소설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을 읽고 든 생각
아나키즘(anarchism)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이해가 잘 안 갔다. 무정부주의가 뭐지? 정부가 없다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사회 각 분야에서 필요한 일을 하지? 나라는 누가 지키고, 교육은 어떻게 시키고, 아픈 사람이나 힘든 사람은 무슨 돈으로 누가 돌보나?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은 대체 어떤 사회를 원하는 건가? 아나키스트(anarchist)가 무정부주의자 외에 폭력 혁명가 혹은 반역자라는 뜻도 포함된 걸로 봐서 우리 사회는 그들을 좋게 보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사전적 의미를 찾기 전부터 무정부주의라는 단어 속에 이미 사회 기반을 흔드는 테러가 느껴졌다. 아마도 내 머리는 자본주의 사회와 정부라는 시스템에 맞춰져서 다른 형태의 사회를 생각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찾아봤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무정부주의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치 철학자 피에르-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이 자신을 “무정부주의자”이라고 지칭한 다음 아나키즘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 무정부주의와 자유주의가 왕왕 동의어로 사용되고 자유지상주의 마르크스주의자, 자유지상주의 사회주의자, 극단적인 문화적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단어가 무정부주의와 연을 맺었다. 어쨌든 무정부주의는 인간 본성이 강압적이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 정치나 사회적 권력이 사라지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어 알아서 서로 돕고 산다는 거다.
인간이 과연 홉스가 말한 인간의 본성,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발현하지 않고 법 없이 알아서 서로 돕고 살 수 있을까? 아나키스트는 국가 권력이 법을 만들어 개인에게 강요하고 토지 등 재산을 사유하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국가나 민족이란 개념을 버리고, 사유 재산 대신 자발적으로 조합을 만들어 모두 똑같이 일해서 노동의 대가로 얻어진 재산을 똑같이 나누면 정부가 필요 없다는 논리다. 국가가 없으니 전쟁이 일어날 일도 없고 토지나 재산이 소수의 소유가 아니니 착취나 권력의 남용도 없다는 거다. 이런 사회가 가능하다면 그런 곳에서 살고 싶은가?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소설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를 읽으면 아나키스트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소설은 달과 비슷한 아나레스(Anarres)에 살던 물리학자 쉐베크(Shevek)가 지구와 비슷한 우라스(Urras)에 가서 자신이 살던 아나키스트 사회를 회상하며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아나키즘과 자본주의 사회의 장단점을 비교적 공평하게 지적하고 있다. 아나키스트 사회의 장점을 꼽으라면 아무도 입을 것, 먹을 것, 살 곳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직업도 자신이 좋아하거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의 일을 선택하면 된다. 예를 들어 보육교사가 되고 싶다면 보육교사 교육을 받고 조합에 들어가 어떻게 아이들을 돌볼 건지 함께 의사결정을 하고 일하면 된다. 그러나 월급은 받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 의식주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남녀 차별이 없고 동등한 일을 한다. 이곳에서 자유의 의미는 모두 공평하게 남을 위해 일하는 거다.
그러나 아나레스의 자연환경은 척박하여 늘 식량이 부족하다. 물리학자 쉐베크도 공동체에서 노동력이 요구되면 막일을 해야 한다. 그래도 양껏 밥을 먹을 수 없다. 옷도 공동체에서 나눠준 옷을 입어야 한다. 집도 일자리에서 가까운 기숙사에 거주해야 한다. 결혼이란 제도는 없지만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 살면 두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방을 얻을 수 있다. 아이가 생기면 4살 무렵부터 공동 탁아소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다. 아이는 이름만 있고 성은 없다. 엄마도 아빠도 내 엄마 아빠가 아니라 소유격을 빼서 말하고 결국 모두 동등한 ‘동무(comrade)’다. 따라서 가족을 형성하여 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일을 따라 주거지를 옮기면 배우자도 자녀도 안 보고 살게 된다. 대신 모든 오도니언즈(아나레스에 사는 사람들)는 가족이 아니어도 서로서로 챙겨주는 게 암묵적 규범이다.
오도니언즈가 처음부터 아나레스에 산 건 아니다. 이들은 “오도(Odo)”라는 여성 혁명가가 창시한 무정부주의(Anarchist) 철학을 신봉하며 우라스에서 혁명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쉐베크가 사는 시점에서 약 170년 전 아나레스에 정착했다. 우라스 정부는 오도니언즈를 아나레스로 추방하여 더 이상 우라스의 자본주의나 독재주의 정부를 비판할 수 없도록 했다. 오도니언즈도 더 이상 우라스 정부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자진해서 그들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몇 가지 기본적인 도구만 들고 아나레스로 이주했다. 아나레스에 와서 처음 한 일은 아나키스트의 평등한 가치를 반영하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 거다. 우라스에서 사용하던 언어는 계급, 권력, 전쟁 등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가득 차서 그런 생각을 아예 할 수 없도록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신분이나 계급을 나타내는 말로 모욕을 주거나 “신성모독”과 같은 종교적 개념의 어휘를 배제했다. 이건 작가가 언어가 사고를 형성한다는 사피어-워프(Sapir-Whorf) 가설을 반영한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평등을 강조하다 보니 소수의 특별한 사람이 차별을 받는 일이 생긴다.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쉐베크는 반에서 물리학적 현상을 발표하자 또래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선생님에게 혼난다. 쉐베크 혼자만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건 “이기적”이란 거다. 오도니언즈는 “이기적” 혹은 “소유자”라는 말을 터부시 한다. 그러나 아나레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 비슷한 역할을 하는 PDC라는 조합이 있고, 그 안에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생긴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불(Sabul)이다. 그는 쉐베크와 함께 일하는 물리학자로서 쉐베크의 논문이 우수하다는 걸 알면서도 출판하지 않았다. 쉐베크의 친구 티린(Tirin)도 아나레스의 이념을 비판하는 듯한 연극을 공연했다고 만성적으로 일을 기피하는 사람이나 살인자를 수용하는 보호시설에 가게 된다. 다시 말해 아나레스에서는 적당히 남들만큼 일하고 개성을 죽이고 살아야 아무 탈이 없다.
쉐베크는 더 이상 아나레스에서 자신의 연구를 계속할 수 없어서 우라스로 떠난다. 우라스에서 쉐베크는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9년 전 쉐베크가 29살에 쓴 논문이 우라스에서 노벨상과 같은 상을 받은 거다. “돈”이 없는 나라에서 온 쉐베크는 상금으로 받은 돈과 연구비 등 돈이 쌓여가지만 경제에 전혀 관심이 없다. 숲이 우거지고, 음식이 풍성한 걸 보며 고국에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시중을 드는 사람이 있다는 게 불편하고, 노동자의 한 달 월급보다 몇 배나 더 주고 별로 쓸모도 없는 물건이나 옷을 사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무엇보다 우라스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에이 아오(A-IO)의 여성들이 대학에 갈 수 없고, 상류층의 여성조차 가부장적인 제도에서 그저 아름답고 순종적이고 가정적인 걸 미덕으로 삼는다는 사실에 놀란다.
과연 쉐베크는 우라스 사람들이 원하는 연구를 마칠 수 있을까? 쉐베크는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아나레스와 우라스가 거리에 관계없이 즉각적인 통신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서로 소통하길 바랐다. 그러나 우라스 사람들은 쉐베크의 연구를 장악해서 무기를 만들고 다른 사람을 감시하고 지배하는 도구를 만들려 했다. 쉐베크는 아나레스에서나 우라스에서 모두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러나 고향의 배우자와 아이들이 그립다. 그럼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첫 장에서 쉐베크가 아나레스를 떠날 때 한 무리의 오도니언즈가 몰려와서 쉐베크가 배신자라며 돌을 던져서 애먼 사람이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사회인 아나레스에는 법이 없어서 조합원들이 죽은 사람을 들것에 싣고 가며 무리를 쏘아보기만 했다.
첫 장부터 계속 질문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나? 정말 아나키스트 사회가 내가 원하는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수 있나? 비록 입을 것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아도 굶는 사람이 없고 모두 일을 하며 서로 돕고 사는 건 마음에 든다. 지구 한쪽에서는 음식이 넘쳐나서 버리고, 과식해서 병이 나고 다이어트를 한다고 난리지만, 다른 쪽에서는 굶주림에 허덕인다는 건 문제다. 그러나 아나키스트가 소유를 죄악시하고 평등에 몰입해서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공동생활 하게 하는 건 무섭다. 물론 내 가족이나 다른 사람을 완전히 공평하게 생각하려면 어릴 때부터 헤어져야 가능할 것 같다. 타인에게 동등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회구성원으로 교육시켰다면 그렇게 자랄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과연 다른 사람을 가족처럼 사랑할지 궁금하다. 왠지 획일적인 로봇형 인간으로 양성될 것 같다. 무엇보다 부모가 되어본 사람이라면 아나키스트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아이와 헤어져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을 거다. 아무래도 나는 아나레스에선 못 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