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명 중 누구를 닮았을까?
지금 당신 옆에 누군가 함께 있다면 그 사람과의 만남이 얼마나 많은 우연의 합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하나?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보면 토마시(Tomas)와 테레자(Tereza)가 인연을 맺게 된 건 여섯 경우의 조합이었다. 우선, 테레자가 사는 마을 병원에 복잡한 신경학적 사례가 발생하여 프라하의 큰 병원 외과 과장에게 연락이 간다. 그러나 과장은 좌골신경통이 생겨서 토마시를 대신 보낸다. 마을에는 몇 개의 호텔이 있었는데 토마시는 테레자가 일하는 호텔에 묵는다. 그리고 프라하로 돌아가는 기차시간까지 여유가 충분하여 호텔 레스토랑에 들린다. 마침 테레자가 근무하는 날이라 토마시에게 서빙을 한다. 이런 우연 중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이 둘은 만나지 못했을 거다.
생각해 보니 나와 남편의 만남도 그랬던 것 같다. 47년 전 남편과 같은 대학에 들어갔고, 4학년 초에 우리 과와 남편 과가 같은 곳에서 일을 하게 되어 1주일간 얼굴을 봤고(물론 그때 나는 전혀 남편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남편의 사촌동생이 한 학년 후배여서 남편이 나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했고, 마침 시간이 나서 공짜 점심이나 얻어먹자고 가볍게 나갔었다. 남편과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고 졸업할 때까지 10개월을 사귀고, 나는 미국으로 가고 남편은 군대에 갔다. 그렇게 각자 미국과 한국에 살며 1200통이 넘는 편지를 교환하고, 3년 만에 재회하여 결혼하고 1년 후 남편이 미국에 왔다.
누구나 자신의 인연은 특별하다고 기억할 거다. 그러나 이렇게 운명적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도 동화 같은 결말이 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토마시와 테레자도 그랬다. 일단 토마시는 성적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다. 결혼생활 2년 만에 돌싱이 되어 “독신으로서만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다”(p.10)고 했다. 전 부인은 비싼 선물을 사줘야 아들을 보여줬다. 그래서 아들도 포기했다. 부모는 손자를 보려고 며느리 편에 섰다. 그는 혈연관계에서 해방됐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과 잤다. 오로지 에로틱한 관계였다. 한 번도 그들과 아침까지 자지 않았다. 그러나 테레자와는 손을 꼭 잡고 아침까지 잤다. 아니 결혼까지 했다. 왜 그랬을까? 그에게 그녀는 아기 모세였다.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떠내려가는 아이. 폭풍우 치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아이를 그냥 둘 수 없었다.
테레자는 불우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테레자를 임신하여 원치 않은 결혼을 하고 난봉꾼과 바람이 난 게 모두 테레자 탓이라고 했다. 그래서 반에서 1등을 하던 딸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라고 했다. 15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웨이트리스가 됐다. 번 돈을 전부 엄마에게 주고 집안일도 하고 이복동생도 돌본다. 그런데 호텔 레스토랑에서 토마시가 불렀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은 테레자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빨래를 하면서도 책을 읽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토마시가 마치 비밀조직의 동지 같았다. 어디 그뿐인가? 토마시가 코냑을 주문하는데 테레자가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 곡이 흘러나온다. 토마시가 묵었던 방은 6번이고 그 숫자는 테레자 부모가 이혼하기 전 프라하에 살던 집 번호다. 토마시는 테레자가 책을 읽던 공원 벤치에 앉아 퇴근하는 테레자를 부른다. 이런 우연이! 드디어 백마 탄 왕자가 엄마로부터 테레자를 구하러 온 거다.
그러나 왕자와의 삶은 순진한 평민이 감당하기에 힘들었다. 특히 테레자처럼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불안했을 거다. 엄마는 “치아는 상하고 난소는 망가지고 주름진 얼굴”로 집안에서 나체로 돌아다녔다. 테레자가 기겁하며 커튼을 치자 엄마는 그녀도 곧 자기처럼 될 거라고 껄껄 웃었다. 테레자는 엄마와 닮은 자신의 몸을 혐오했다. 그리고 많은 여자들과 풀장을 돌며 토마시의 총에 맞아 죽는 악몽을 꾸고 또 꾼다. 그럴 때마다 토마시는 그녀를 꼭 안아주지만 뭇 여성과 자는 버릇은 끊지 못한다. 그중 토마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여인은 사비나였다.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화가로 토마시처럼 성관계를 가볍게 생각했다. 만났을 때만 집중하고 다른 때는 참견하지 않았다. 그래서 토마시의 부탁을 받고 테레자의 일자리까지 구해줬다.
테레자는 암실 보조로 시작해서 기자까지 된다. 프라하의 봄, 소련이 체코를 침공하는 잔인한 장면이 담긴 그녀의 사진은 서방으로 넘어가 언론에 실렸다. 그러나 스위스 망명 시절 그녀의 사진은 한물간 뉴스였고, 체코에선 비밀경찰이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는데 이용됐다. 결국 그녀의 삶의 의미는 토마시의 온전한 사랑이다. 그래서 아무리 토마시가 자유를 포기하고 자신을 쫓아 프라하로 돌아왔어도, 머리에서 여자 냄새가 나는 한, 그를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전원생활을 하며 마음이 안정되자 비로소 나이 든 토마시가 안쓰럽다. 굳은 손가락으로 다 낡은 트럭 바퀴를 교체하는 모습을 보니 그가 천직을 그만둔 게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토마시 몰래 취리히를 떠날 때 그가 자기를 쫓아올 거라고 예견했다. 그때 그를 위해 취리히에 남았다면 토마시는 계속 외과의사로 성공했을 거다. 그러나 남편이 스위스에서 조차 사비나를 만나자, 참을 수 없었을 거다.
반면 사비나는 사람이든 사상이든 얽매이는 게 싫다. 삶은 특별한 의미도 없고 그저 순간적인 아름다움만 가볍게 느끼면 된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국가든 맘만 먹으면 배신할 수 있다. 그녀에게 배신이란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진실하고 창의적이며 자유롭게 사는 거다. 그래서 아내에게 불륜을 고백하고 사비나에게 온 프란츠에게 정열적인 밤을 선물하고, 다음날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더럽고 어두운 면을 보여주지 않는 “모든 정치인과 정당, 그리고 정치 운동의 미적 이상”(p.251)인 키치(Kitsch)를 혐오한다. 다양한 정치적 성향이 사라지고 하나의 정치운동이 권력을 독점하면 전체주의 키치가 등장한다. 쿤델라는 굴라그(gulag)가 바로 "전체주의 키치의 정화조"라고 했다.
스탈린주의가 가장 끔찍하던 시절 사비나는 미대생이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교수는 “소련 사회는 엄청난 발전을 이뤄… 선과 더 나은 선의 갈등”(p.252)만 있다고 했다. 이때 소련 영화는 가장 순수하고 순결한 내용만 보여줬다. 사람들은 그때 영화가 공산주의의 이상을 보여줬다고 하지만 사비나는 소련의 키치에 사는 것보다 처형당하는 진짜 소련에 사는 게 낫다고 여긴다. 사비나에게 키치는 사랑하는 엄마와 현명한 아빠가 있는 평화로운 가정의 이미지다. 그러나 그녀도 영화에서 배은망덕한 딸이 아버지를 껴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배신의 대가는 공허함인가? 부모와 토마시 부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갑자기 프란츠를 그리워한다.
프란츠는 테레자보다 더 삶의 의미가 무거운 사람이다. 스위스인 프란츠는 영재여서 평탄한 학자의 길을 걸어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글을 쓰고 가르칠 때보다 정치적 구호를 외치며 데모할 때 더 희열을 느낀다. 사비나에게 끌린 것도 그녀가 체코에서 망명한 예술가란 점도 작용했다. 그래서 처음 사비나가 떠나고 당황했지만, 곧 그녀가 어디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체코 망명자 모임에도 나가고 대진군(Grand March)에도 참여한다. “대진군은 형제애, 평등, 정의, 행복을 향한… 행진이다… 좌파로 만드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어떤 이론이든 대진군이라는 키치에 통합시키는 능력이다” (p. 257).
그러나 대진군에 빠졌던 프란츠는 어이없게 사망한다. 캄보디아 의료구호 활동을 나갔다가 캄보디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방콕 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중상을 입고 귀국한다. 뒤늦게 구호활동에 참여한 걸 후회한다. 대학원생 동거녀가 말릴 때 들을 걸… 그녀와 평온하고 행복했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 보고 싶은 대학원생 대신 보기 싫은 아내가 병실에 들어온다. 프란츠는 아내에게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말을 할 수 없다. 아내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아내만 보는 것 같았다. 아내는 그가 자기에게 눈으로 사과했다고 믿었다. 결국 그의 장래는 아내가 성대하게 치렀고 그에게 남은 건 “긴 방황 후의 귀환”이란 비문뿐이었다.
도대체 쿤데라는 이 네 사람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소설 서두에 니체(Nitzsche)의 영원회귀 철학과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철학이 언급된다. 영원회귀는 우리의 삶이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 무거운 책임이 따르지만 “무거운 짐은 삶의 가장 강렬한 충만함을 상징”해서 (p.5) 보람을 느끼는 거다. 반면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움을 찬양했다. 세상이 빛과 어둠처럼 상반된 두 쌍으로 이뤄졌는데 가벼움과 무거움 중 가벼움이 긍정적이고 무거움은 부정적이다. 그러나 쿤데라는 이 두 철학에 의문을 제기했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며… 어떤 결정이 좋은 지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비교할 두 번째… 삶이 주어지지 않아서다” (p. 222). 그럼 진지한 삶만 잘 사는 걸까? 가족이나 사회의 관습에서 자유로운 삶은 나쁜 건가?
토마시는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겼지만 테레자의 아픔을 등한시하지 않고 공감할 만큼 인정이 많았다. 취리히에 남았으면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테레자에게 돌아가서 직업도 잃고 자유도 잃었다. 그래서 후회했다. 예전 환자를 만나고 동료를 만난 후 심한 자괴감에 빠지며 테레자를 원망했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은 그가 한 거다. 나중에 테레자가 이 일을 언급했을 때 그는 “내가 여기서 행복한 걸 눈치채지 못했니?”이라고 (p. 313) 했지만, 정말 그럴까? 아마도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 나왔던 화자 같은 심정이었을 거다. "먼 훗날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얘기할 거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었고, 그것 때문에 모든 일이 달라졌다고."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테레자일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그녀는 목적을 달성했다. 토마시와 단 둘이 평온한 전원생활을 즐긴다. 더 이상 토마시는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없다. 그는 집단농장에서 트럭으로 농부를 실어 나르고, 테레자는 소를 돌본다. 프라하에서 토마시가 200명도 넘는 여자를 만나고 다닐 때 테레자는 그가 빨리 나이 들어 힘이 빠지길 바랐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또, 시몬이 아버지를 더 알아갈 시간을 갖지 못한 것도 안타깝다. 결국 우리 인생도 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나씩 이루고 나면 그렇게 끝이 온다. 다행히 많은 사람은 인생의 겨울에 서서 봄 여름 가을을 되돌아보면 고생보다 힘든 시간을 이겨낸 게 흐뭇하게 기억될 거다.
곰곰 생각해 보니 나도 이들 4명을 조금씩 닮은 것 같다. 테레사처럼 남편에게 바라는 것은 신뢰와 정절이고, 사비나처럼 내가 생각하는 진실이나 의미를 고수하며 나를 구속하거나 강제하는 모든 사상이나 문화를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프란츠처럼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느껴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키치도 갖고 있다. 토마시가 테레사에게 느꼈던 깊은 연민을 나도 남편에게 느낀다. 그래서 토마시의 여성 편력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이 그토록 싫어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마다 성적 욕구가 다르니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든다. 물론 이들은 내레이터가 말하듯이 작가가 지어낸 인물들이니 너무 깊이 따질 건 없다. 종합해 보면 나는 사상의 자유를 원하지만 비교적 무거운 사람인 것 같다. 우리 세대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게 중요하다. 무엇이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결과가 좋다고 믿는다. 그래서 모든 걸 빨리 얻고 빨리 변하는 가벼움이 염려스럽다.
<참고문헌>>
Kundera, M. (1999).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New York: Harperperennial Modernclass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