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행복한가?

by 명희


행복이란 말을 자주 쓰면서 행복한 게 뭔지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어릴 때는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았지만 그게 행복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는 남편과 사이가 좋고 아이들이 잘 자라줘서 감사한 마음이 행복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남편이 조금만 섭섭하게 하거나 아이들이 조금만 말을 안 들어도 금방 마음이 바뀌었다. 그러다가 내가 "참 행복하다"라고 느꼈던 때는 만 43세에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다. 늦은 밤 수업을 마치고 버펄로의 눈을 뚫고 집으로 돌아오며 혼자서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내가 마음에 그리던 일이 실제로 이뤄져서 그렇게 느꼈을 거다. 그런데 내가 갖게 된 행복을 잘 들여다보면 난 그냥 운이 좋았다. 그래서 영어로 행복(Happines)의 Hap이 우연(chance) 혹은 행운(Fortune)이란 뜻인 게 놀랍지 않다. 다른 유럽 언어에서도 웨일스만 빼고 행복의 첫 번째 의미는 ‘행운’이란다. 웨일스는? 지혜로운(wise) 거다. 이것은 그리스어의 행복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와 통하는 것 같다. 에우다모니아는 "eu(좋은)"과 "daimonia(수호신)"의 합성어로 “좋은 수호신”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에 대해 길게 설명했는데 한 마디로 미덕을 실천하는 삶이다. 정리하면 행복하다는 것은 우선 운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운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어서 누구든 행복하고 싶으면 미덕을 실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덕이 뭐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건 너무 길고 어려워서 이런저런 사람이 해석해 놓은 걸 읽어보니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훌륭한 특성을 관찰함으로써 상식적 직관으로 미덕을 판단할 수 있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즉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미덕은 신중함, 절제, 용기, 정의와 같은 가치를 지닌 태도나 성격으로 우리가 이런 가치를 바탕으로 행동하고 성장하여 우리가 선택한 이상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가치를 발현할 때 과잉과 결핍 사이의 중용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용기 있는 사람은 죽음의 공포를 두려워하지만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두려움을 견디고 자신감을 갖는 거다. 이와 달리 과도하게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미칠 수 있고, 과도하게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성급해서 용기 있는 척하지만 실은 겁쟁이란다. 그리고 미덕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한 두 가지 가치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앞에서 말한 네 가지 가치를 전부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미덕을 갖춘 인격이 되는 건 평생 프로젝트다. 그리고 이런 미덕을 함양한다고 생각 없이 윤리적으로만 행동하는 건 바리새인처럼 외화내빈일 수 있다. 그보다 세상을 명확하게 보고 더 나은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는 미덕을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을 갖춰야만 비로소 삶이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신중하고 절제하며 용기 있고 정의롭게 판단하고 행동하면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스스로도 만족하여 행복할 거다. 그러나 이런 가치를 평생 연마해야 한다니 젊어서는 행복할 수 없나? 행복할 수 있다. 알리스토텔레스도 행복에는 네 단계가 있다고 했는데 즉각적인 만족이나, 비교 성취의 만족, 긍정적인 기여로 인한 행복감은 젊어서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자아실현 단계의 행복은 시간이 걸릴 거다. 무엇보다 가까이 미덕을 실천하는 삶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보고 배울 거다. 아무리 좋은 가치도 말로만 강요받으면 답답하고 힘들어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잊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 경험하는 게 중요한데, 일상에서 미덕을 경험하는 기회가 많으면 자신도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이런 고귀한 가치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지만 매일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어 사전에 나온 "행복"의 뜻대로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를 종종 경험한다. 좋은 책을 읽고 감명을 받거나, 가족이나 친구와 만나 떠들거나, 친절한 말을 듣거나, 계획한 일을 모두 마쳤을 때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심리학에서 행복은 주관적 웰빙으로 현재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개인적 감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우리는 모두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는데 행복은 긍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경험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삶의 만족도는 인간관계, 일, 성취 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다양한 영역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는지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결국 행복은 스스로 자기 삶에 만족하는 감정으로 개인이 스스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에 경험한 행복한 순간을 공유하겠다.


장에 가거나 병원에 갈 일이 있을 때 들리는 도넛 가게가 있다. 도넛을 사면서 진열대에 있는 목캔디를 샀다.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도넛 봉지만 가져오고 목캔디는 놓고 왔다는 걸 알았다. 그것도 저녁 10시에. 어떻게 그렇게 정신이 없을까 속상했지만 다음날 그곳에 갈 일이 없어서 그냥 잊기로 했다. 그러다 일주일 후 다시 병원에 갈 일이 있어서 도넛 가게에 들렀다. 그리고 직원에게 겸연쩍게 웃으며 물어봤다. "있죠. 제가 지난주 여기서 도넛을 사면서 목캔디를 샀는데 정신없이 목캔디를 놓고 갔거든요. 혹시 기억 못 하시겠죠?" 이렇게 말하는 게 쑥스러워 곧바로 "바보 같지만 그냥 물어봤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뜻밖에 직원이 물었다. "레몬 맛인가요?" "맞아요." 그녀가 진열대에서 레몬맛을 꺼내 줬다.

"기억하셨군요. 너무 감동입니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정말 감사해요.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말 감사해요."

대학 병원과 연결되는 지하철 입구 가까이 있는 도넛 가게라 늘 사람이 붐빈다. 그런데도 1800원짜리 목캔디를 놓고 간 손님을 기억해준 거다. 모른다고 했어도 할 말이 없었을 거다. 그런데 그녀는 정직하게 나를 기억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가! 기분이 좋아서 도넛 두 박스를 사서 학교에 가서 나눠줬다. 이렇게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을 통해 정의로움을 경험했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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