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친구

우리 때는 국민학교였다.

by 명희

나이가 들고 보니 어릴 적 일들을 회상하며 기록하게 된다. 마음 아프거나 슬픈 일도 많았지만 그보다 재미있고 긍정적인 기억을 쓰게 된다. 그게 마음 편하고 행복하다. 한때 과거의 슬픈 일을 기록하며 마음을 달랬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힘들었던 일을 쓰고 다시 읽으니 원망만 쌓이고 우울해졌다. 그래서 그런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이제 그럴 시간이 없다. 남편과 처음 만난 게 오래전 일 같지 않은데 벌써 4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니 좋은 기억만 하며 즐거운 기억을 만들어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사라지기 전에 부지런히 옛날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나는 지금까지 만나고 있는 어릴 적 친구가 하나도 없다. 심지어 대학교 친구조차 만나는 사람이 없다. 초등학교 때 세 나라를 돌아다니며 4번이나 전학했고 계속해서 몇 번 더 전학하고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한국에 돌아오긴 했지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연락을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잠깐이지만 좋은 친구와 즐겁게 지낸 기억이 많다. 되돌어보니 그들 덕분에 집에서나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걸 알게 됐고 내 삶이 풍성해졌다. 무엇보다 그들이 모두 친절하게 대해줘서 나도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게 좋다는 걸 알게 됐다.


초등학교 3학년, 한국에 처음 돌아와 사귄 친구는 학교 근처 작고 낮은 빨간 기와집에 살던 친구였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보다 키가 크고 피부는 하얗고 예쁘장했던 것 같다. 작지만 깨끗한 마루 중앙에 우리 키만 한 냉장고가 있었고 우리는 주로 안방에서 놀았다. 친구는 언니가 두 명이고 남동생도 한 명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 교복을 입었던 한 언니가 피아노를 잘 쳤던 게 기억난다. 그 집에 놀러 가면 어머니도 다정하고 언니들도 친절했다. 거의 매일 그 집에서 놀고 밥을 먹기도 했다. 그래서 친구 집에서 처음 해본 게 많다. 제대로 태극기 그리는 법을 처음 배웠고, 물김치도 처음 먹어봤고, 꿩고기도 처음 맛봤다. 한여름 냉장고 안에 있던 물김치를 먹는 순간 김치가 맛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또, 꿩고기는 친구 아버지가 사냥한 거라고 줬는데 너무 맛있어서 좀 더 먹지 않은 걸 후회했다. 친구 아버지도 자상했다. 퇴근해서 우리가 안방에서 놀고 있으면 밖에 나가 놀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어느 날 새로 산 빨간 포니 차로 드라이브까지 시켜주셨다. 차를 가지고 온 날 여느 때처럼 그 집에 있었는데 언니 한 명이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서 눈치 없던 나는 신나게 그 집 행사에 끼게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친해졌는지 모르지만 부모님끼리 아는 사이였고 더 이상 놀지 못하게 된 건 아마도 친구네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서 그랬을 거다.


그 친구가 떠나서 섭섭했지만 곧바로 많은 친구와 사귀며 이 집 저 집 놀러 다녔다. 그러나 그 친구처럼 부모님까지 생각나는 집은 없다. 다만 짧게 놀았지만 확실히 기억나는 친구가 한 명 더 있다. 자가용으로 등교하는 부잣집 아이였다. 모든 가족을 본 적은 없다. 양장 차림으로 외출하는 어머니를 딱 한 번 봤고 말로만 듣던 중학생 오빠를 한 번 봤을 뿐이다. 친구는 부모님이 일본에서 사 온 과자를 먹으러 오라고 하거나 비밀 이야기를 말해주겠다며 나와 다른 친구를 집에 데리고 갔다. 일본 과자는 짭짤하고 매콤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친구의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우리 반뿐만 아니라 다른 반 심지어 6학년 언니 오빠까지 누가 누구를 좋아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알려줬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우리는 그 친구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3학년 때까지 남자아이와 치고받고 싸우기까지 했던 내가 4학년이 되어 나를 좋아한다는 아이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친구는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써 놓고 같은 자음 모음을 지우고 남은 글자를 세며 좋아하는지 따르는지 싫어하는지 사랑하는지 원망하는지 알 수 있는 점괘 비슷한 걸 가르쳐줬다. 그 후 방학 내내 우리 학년 모든 남학생과 나의 관계를 그 방법에 따라 예견해 봤다. 겨우 만 10살 11살에 그런 감정이 들다니, 불현듯 생각나면 피식 웃게 된다.


요즈음 어린 학생들은 학원 다니느라 바빠서 친구랑 놀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릴 때 아무 생각 없이 뛰어놀고 음식을 나눠먹었던 친구가 있었다는 게 감사하다. 자주 놀러 오는 아이에게 눈치를 주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줬던 친구의 부모에게 감사하다. 이성을 좋아하는 마음이 나쁜 게 아니란 걸 알려준 친구에게 감사한다. 지금 그 친구들이 어디 있을지 궁금하지만 친절했던 심성을 갖고 있어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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