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by 명희

어릴 때 중국집에 가서 내가 주문한 음식만 나오지 않아 입을 삐죽 거지자 "원래 맛있는 음식은 더 늦게 나오는 법이야. 만드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잖아."라고 아버지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 말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비교적 잘 기다리는 편이다.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더 맛있는 음식이 나올 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계획한 일을 꾸준히 하면서 기다린다. 그리고 '시장이 반찬'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늘 기다림 끝에 먹었던 음식은 맛있었다. 되돌아보니 기다림 끝에 맞이한 결과는 늘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결혼도 긴 기다림 끝에 이뤄졌다. 남편과 결혼을 약속하고 태평양 건너 4년간 떨어져 지냈다. 남편은 군 현역 복무 대신 무의촌에서 공중보건의사로 3년간 근무했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에 건너가 가족과 지냈다. 지금은 무료로 외국에 있는 사람과 영상통화가 가능한 시대지만 당시 국제전화는 교환원을 통해야 했고 매우 비쌌다. 남편은 생일 등 특별한 날에 읍내에 나와 국제전화를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3~4번 손 편지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떨어져 지내며 서로에게 600통이 넘는 손 편지를 썼다. 남편이 공중보건의 복무를 마치고 세브란스에서 인턴을 시작할 때 약혼을 하기 위해 한국에 나왔다. 3년 만에 재회였다. 아버지는 약혼만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한국에서 이틀을 지내고 시차 적응이 되기도 전에 돌아갔다. 미국에 있던 직장 동료들은 내가 한국에 너무 빨리 갔다 온 걸 의아해했다. 그때는 섭섭했지만 되돌아보니 아버지 말씀을 들었던 게 나쁘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더 애틋해졌다.


첫 아이도 우리가 계획했던 시기보다 한참 후에 만났다. 아이를 갖기로 마음먹고 9개월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살짝 불안해질 무렵 임신이 됐다. 너무 신나서 곧바로 임신복을 입고 출근했다.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마다 시카고 한인 타운 음식점을 찾았다. 내 몫의 공깃밥은 늘 기본 두 그릇이었다. 88 올림픽이 끝나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와 마주했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엄마가 된 것 같았다. 살아 숨 쉬는 생명이 내 안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런 아이를 키우며 또 기다림을 배웠다. 아이가 뒤집고 기고 서고 걷고 말하고... 다른 아이보다 느리면 어쩌나 불안해했는데 기다리면 다 하게 된다는 걸 알게 해 줬다.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싶다는 나의 꿈도 오래 기다려 이뤄졌다. 원래는 정신과 간호학을 가르치려 했는데 영어를 가르치게 됐다. 둘째가 3살이 되었을 때 신시내티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 진학을 권유받았지만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생겨서 잠시 쉬기로 했다. 석사 논문을 발표하던 날 아이들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아이들을 차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늘에 차를 세우고 창문은 반만 내렸다. 30분 정도만 기다리라고 했다. 평소 아이들끼리 잠시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호하게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만으로 겨우 4살 6살인 아이들. 미국에서 만 12세가 안 된 아이들이 혼자 있으면 심각한 범법행위로 간주해서 아이를 뺏길 수도 있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차 안에 놔둘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40분 가까이 있다 차에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아이들이 너무 대견하고 고마워서 펑펑 울었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엄마가 우니까 따라 울었다. 그 후 아이들 교육에만 집중하다가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다시 영어로 전공을 바꿔서 대학 강단에 서는 꿈을 꾸게 됐다. 거의 20년을 기다려 꿈이 이뤄졌다.


내게 기다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작년에 우연히 프랑스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취미로 공부한 프랑스어를 이렇게 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2018년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프랑스어 학원에서 회화를 공부하는데 작년 초에 학원에서 만난 학생이 추천해서 영화를 찍게 됐다. 사실 그 학생과 개인적으로 말한 적도 없다. 우연히 그 학생이 내가 듣는 회화반에 왔고 우연히 그 학생의 지인이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중년 여성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내가 떠올랐단다. 당시 프랑스어 선생님이 카톡방에 자료를 올려줘서 내 카톡으로 연락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후 그 학생은 학원에 나오지 않는다. 프랑스어 선생님도 카톡방을 운영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시 내가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던 건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감독님이 나를 배려해서 딱 하루 내 장면을 모두 찍었다. 그 후 1년. 영화는 깐느 영화제에서 Un Certain Regard (주목할 만한 시선)에 올랐고 부산영화제에서도 상영했다.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간 격리가 끝난 다음날 부산에 내려가서 영화를 봤다. 화면에서 내 얼굴을 보는 게 낯설었다. 처음 떠오른 느낌은 내가 많이 나이 들었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보다 프랑스어가 서툴다. 좀 더 연기 연습을 할 걸... 프랑스어도 연기도 매력적인 분야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다 보면 간간히 기다림 끝에 기분 좋은 깜짝 선물이 있다는 걸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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