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
때는 작년 건강검진 직후.
집으로 배달 온 건강검진 결과표를 먼저 손에 넣은 나는 체중 부분을 검정유성펜으로 찍찍 그어 안 보이게 만들고, 퇴근해 들어온 남편에게 그걸 건넸다.
"다 정상인데, 내 체중은 비밀이라 어쩔 수 없는 조치야. 이해하지?"
"...."
그 말에 대꾸도 없이 결과지만 보고 서 있던 남편, 갑자기 거실로 가 집에서 가장 밝은 형광등 아래 그 결과지를 비춰 보는데... 그 순간 나의 체중은 여지없이들통나 버렸고...
그래서 올해는 나도 작년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위해 좀 더 철저한 준비, 조치를 취했다.
검정유성펜 따위가 숫자를 완벽히 가리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에 덮지 않고 잘라내 버렸는데...
혹 누군가는 어차피 작년에 들통난 거 굳이 이렇게까지 숨길 필요가 있겠냐 하겠지만, 상대가 심증을 굳혔다고 해서 내가 먼저 확증을 들이밀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결혼 7년 차 (신혼이라 우기면 아직 신혼인) 나는 체중 같은 건 남편에게 갖다바치고 싶지 않다. 이미 삶의 모토가 다이어트에서 건강, 그래서 체중같은 숫자 따위 스스로는 별로 신경쓰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남편은 영영 몰랐으면 하는 게 내 마음.
그런데 그런 게 또 하나 있다. 과거 나의 치질수술 이력이다.
남편에게도 말 못한 비밀 중 하나를 여기서 공개하자면, 나는 남편을 만나기 한 두해 전 치질수술을 했다.
치질이 발생한 건 그보다 한참 전 고3시절이지만, 피곤하거나 큰 힘을 줬을 때 한 번씩 아프고 불편해도 수술까지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서른 중반도 넘어 마흔 코 앞, 그때까지도 모태솔로 지위를 내려놓지 못하고 늙어 죽게 생기자,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생각으로 감행한 것이 바로 치질수술인데...
이렇게만 말하면 모태솔로랑 치질수술이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이 둘 사이엔 충분히 그럴만한 개연성이 숨어있다.
당시 나는 마흔을 앞둔 모태솔로였고, 결혼이 힘들면 남자라도 만나자는 생각에 전에도 얘기했던 것처럼 [일단 무조건 연애 모드]에 돌입했었다. 그럴려면 필요한 게 몸과 마음의 준비. 열린 마음도 필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당당한 몸. 당당한 몸이 되려면 다이어트와 함께 치질 수술...?
영화나 드라마에선 데이트를 앞둔 여주인공이 갑자기 있을 어떤 일에 대비해 위아래 세트 속옷을 구비하는데, 나는 치질수술부터 했다.
여기엔 나와 비슷한 처지면서 날마다 얼굴만 맞대면 남자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던 내 친구 H도 한 몫을 했는데...
사실 나는 남자와 치질 같은 건 연결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런데 어느 날 H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토보이야. 실은 나 치질 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이 와도 뭘 할 수가 없어. 나 수술할까?"
순간 나는 속으로 '역시 H는 나보다 한 수 위. 그래도 만나는 남자라도 있었니까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 감탄했는데...
결과적으로 수술은 내가 했다. 그리고 그 덕... 은 아니지만 결혼도 내가 먼저 했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그때 수술을 먼저 고민했던 H는 아직도 남편 대신 치질과 함께 산다.
그런데 이 사실을 온 세상에 글로는 다 까발리면서, 아직 남편에겐 밝히지 못한 나.
친정 식구 다섯 명 중 네 명, 우리집은 언니만 빼고 다 치질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남편에겐 마치 그게 나인 것처럼, 나는 치질수술에 대해 들어서만 아는 것처럼, 여전히 떠든다.
"우리집은 나만 빼고 다 했어. 우리 엄마 말이 살면서 가장 잘 한 일이 치질 수술이라더라? 호호호."
사실은 내 말이면서... (쩝)
그렇지만 내 남편이 내 체중을 안들, 내가 치질수술 경험자인 걸 안들, 그게 뭐 그리 대수랴!
다만 나는 이제사 말하는 게 조금 겸연쩍어 아직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결혼 전 사귀던 남자가 비밀이고 싶지만, 그조차 없는 모태솔로이니 이 정도 비밀은 간직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