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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때 잘 흘리는 사람

어쩔 수 없이 나이 탓

by 토보이

말한 하면 나이 탓 하는 거 정말 싫어하는 사람 나.

그런데 요즘은 나이 탓을 빼면 할 이야기가 없는 사람, 그것도 나다!


옛날엔 안 그랬는데 (안 그런 것 같은데), 요즘은 왜 그렇게 뭘 잘 흘리고 잘 떨어뜨리는지 모르겠다. 의도치 않게 튀기도 참 많이 튄다.

근데 이게 고약한 노릇인 게, 흘리고 튄 게 바로 보이면 다행인데 꼭 당시엔 보이지 않다 하루 아니면 며칠이 지나 어디선가 발견된다. 식사준비 할 때 튄 김칫국물, 먹을 때 옷에 떨어뜨린 밥풀, 심지어 귀청소를 한 게 어젯밤 욕실인데, 그 잔여물이 오늘 아침 내 침대 머리맡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건, 이런 건 꼭 남편이 발견한다. 그리고 발견을 했을지언정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가져다 버리면 다행인데, 남편은 꼭 기가 막히게 그걸 알아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끝까지 그게 뭔지 모른 척, 그게 왜 거기 떨어져 있냐고, 시침을 떼는 일 밖엔 없는데, 그러면서도 나는 속으론 애써 화끈거림을 누른다.


빨래를 하려고 보면 날마다 출근하는 남편의 외출복보다, 대부분 집에 있는 나의 실내복이 더 많이 쌓여있을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가끔이 아니라 자주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상하게 언제부턴가 나는 먹을 때 잘 흘리는 사람, 그래서 집 안에서 입는 옷도 거의 매일 갈아입다시피 한 사람이 됐다.

심할 땐 두 어번쯤 갈아입을 때도 있다. 먹다가도 흘리고, 요리 하다가도 흘리고, 흘리고 또 흘리고... 어떨 땐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그것들이 나한테 와 들러붙은 게 아닌가 싶을만큼, 억울하게도 나는 옷에 무언가를 잘 흘리고 묻히는 사람이 됐다.

그런데 처음부터 내가 그런 사람이었냐 하면, 분명 그건 또 아니다. 내 기억에 나는 흘리는 쪽보다 흘리는 쪽을 챙겨주던 쪽이었다.

친구 중에 유독 먹을 때도 잘 흘리고 물건도 잘 흘리는 J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매번 J와 식사를 할 때면 카운터로 가 냅킨을 가져다주고, 흘리고 가는 물건을 챙겨다 건네는 건 내 쪽이었다.

"J야, 자 냅킨!" "J야 너 핸드폰은?" ...


그런데 지금은... 내가 영락없는 J다. 특히나 상대가 남편이면 더 그렇다.

"토보이, 옷에 그거 뭐야?" "토보이, 지갑은 챙겼어?" ...

심지어 남편은 내가 자기 없을 때 몰래 먹고 치운 과자까지도 알아 맞춘다.

"토보이, 오늘 꿀짱구 먹었네?" (소름)

완전범죄를 꿈꾸며 과자봉투는 물론이고 과자봉투를 버린 종량제봉투까지 내다버려도, 러그 위로 떨어져 털 사이로 보일까 말까 한 과자 부스러기 하나까지 남편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이쯤되면 내가 아니라 남편이 비정상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잔소리를 하거나 면박을 주진 않으니 나 역시 별로 개의치 않는 편.

어쩌면 그래서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잘 흘리는 사람이 돼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엔 샐러드를 먹다 소스를 옷에 찍 흘리는 나를 보고, 남편이 한 마디를 했다.

"그러지 말고 옷을 홀랑 벗고 먹는 게 어때? 먹고 샤워를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러곤 지 말에 지가 더 크게 푸하하 웃는 남편.

누구는 그 웃음을 비아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안다. 남편은 그냥 자기가 친 드립에 스스로 만족해 웃는다는 걸.

해서 속으로 잠시 ‘이걸 죽여 살려’ 고민하던 나도, 덩달아 풉... 웃음으로 받았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기도 했지만, 나의 칠칠맞지 못함을 위트있게 표현한 남편이 기특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 말 자체가 그냥 재밌어서 덩달아 하하하.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아싸! 에피소드 겓. 나중에 오래된 연인 관계나 권태기 부부 얘기 쓸 때, 싸가지 없는 남자 캐릭터로 써먹을테다'


당분간 나는 계속 흘릴 예정인 사람이다.

그렇지만 앞날은 또 모른다. 내가 챙겨주는 사람에서 챙김을 받는 사람이 되었듯, 남편과 나의 관계도 언제 뒤바뀔지 모른다. 그러니 그때 돼서 내가 남편에게 쪼잔한 앙갚음 따위 하지 않게, 남편이 지금처럼만 나를 잘 챙겨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마다 불가피하게 조금씩 솟구치는 짜증은... 그것도 지금처럼 알아서 잘 넘겨줬으면 좋겠다.


잘 부탁한다.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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