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공주처럼 살아요. 인어공주...

남자를 얻고 일을 잃다.

by 토보이

나는 흔히들 말하는 경단녀다.

일을 잃게 된 게 비단 결혼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리고 결혼 전 커리어가 대단히 훌륭했던 것도 아니지만, 결혼 후 차츰 일이 줄게 됐고 현재는 우리집 주부로만 활동하고 있으니, 나 또한 나름 경단녀라면 경단녀!


먼저 나이 서른여덟. 남편을 만나 모태솔로를 탈출한 그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나는 난생 처음 해보는 남편과의 연애에 푹 빠져 있었고, 일 같은 거 뒷전이었다. 공교롭게도 (사실은 운 좋게도) 당시에 나는 연애와 새로운 작업을 동시에 시작했는데, 모태솔로도 갓 탈출한 주제에 일과 사랑을 병행? 내 생각에 그건, 밤샘 야근을 하면서도 연애도 쉬지 않고 하는 영화 속 여주인공이나 가능할 법한 일이었다.

그저 나는 그가 퇴근할 무렵이면 집에서 올 스탠바이를 하고 앉아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게 설렘이자 일이였던 사람. 그의 만나자는 연락에 "미안, 오늘은 회의가 있어서." 혹은 "오늘은 작업할 게 좀 남아서 못 볼 것 같아." 같은 건 할 수도 없고, 하고싶지도 않았던 사람이다.

하루 종일 나는 그의 연락만 기다리며 뭘 입고 나갈까 어딜 갈까 궁리하기 바빴다. 그래놓곤 그에게 전화가 오면 시침 뚝 떼고,

"응 마침 나도 오늘 작업 막 끝냈어. 그럼 우리 어디서 봐?"

지금 생각해보면 모태솔로였던 게 맞나 싶을만큼, 연애에만 능수능란(?)했다.

그러니 의뢰받은 작업이 잘 될리 있나. 매번 쓰는 트리트먼트마다 수정을 요구 받았고, 급기야 담당 피디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잘 쓸 것 같아서 맡긴 작업인데, 솔직히 지금은 그 판단이 맞나 싶어."

그러면서 작업을 전면 재수정,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분명 초심으로 되돌아가보자는 말이었지 관두라는 소리는 아녔는데...

나는 재고조차 해보지 않고 바로 관두겠다고 질렀다.

"마침 저도 말씀 드리려던 참인데, 드디어 저 연애를 시작했어요. 그래서 앞으로 일 같은 건 못할 것 같아요."

였지만, 차마 이렇게는 말 못하고...

"마침 저도 말씀 드리려던 참인데, 이건 제가 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닌 것 같아요. 다른 작가를 찾아보시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나는 밥 넣어준지 얼마 안된 통장을 도로 두르려 패 토해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와의 연애에만 올인, 1년 6개월 만에 결혼까지 성공했는데...

마흔을 코 앞에 뒀던 모태솔로가 첫 연애도 모자라 결혼까지 성공하자, 기고만장 그 자체. 내심 나는 될년될이었다며, 실연한 친구에게는 "될 사람이면 다 돼. 안 된 건 인연이 아닌 거지.", 연애가 어려운 후배에겐 "나를 봐. 결국 인연은 다 있다니까?"를 재수없게 떠들고 다녔다. (반성합니다)


그 업보일까. 그 후 나는 작업 의뢰가 딱 끊겨 버렸다.

결혼 후 누가 "요즘 무슨 작업해?" 물으면,

"저는 남자를 얻고 일을 잃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인어공주처럼 놀아요.하하하!"

실없이 말하고 속없이 웃지만, 실상 나는 많이 뼈아프다.

일을 잃은 게 어찌 결혼 탓이랴. 과거 프로답지 못했던 내 탓이지. 그러니 그냥 웃어넘기자고 한 말이지만, 인어공주나 진짜 경력단절여성들에겐 좀 면목이 없다.


그런데 이게 남편이나 시댁으로 가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결혼할 당시 남편은 나를 시댁에 시나리오 작가 겸 대학 강사라고 소개했고 그게 또 사실이기도 했지만, 결혼 후 글작업도 강의도 다 관뒀으니, 그럼 그들에게 현재 나는 어떤 사람일까?

사실 간단하다. 나는 전업주부요, 남편은 외벌이 가장.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또 이게 아이러니 한 게 팩트라고 해서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는 건 또 별로다.

남편은 가끔 나를 긁지 않은 로또, 자신을 장항준 감독처럼 살게 해 줄 미래의 김은희 작가라고 실없이 떠들어대는데, 그게 또 싫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가 터질지 모르는 대박의 꿈을 안고 매일매일 글을 쓰냐 하면, 그것도 또 아닌데...

장르를 바꿔 웹소설에 도전했다 그게 잘 안되면 당근에 알바를 찾고, 알바를 하다 몸이 힘들어지면 그래도 역시 배운 게 도둑질이라며 글을 쓰고, 그러다 누가 또 간호조무사나 부동산 관련 자격증이 유망하다고 하면 그것도 좀 해볼까 기웃기웃...

나이만 마흔을 훌쩍 넘겼다 뿐이지, 여전히 나는 진로고민을 하는 사춘기 여학생과 다를 바가 없다. 차라리 자신이 무엇을 하고싶은지 무엇을 제일 잘 하는지 알면 답도 빠를텐데, 여전히 나는 그걸 잘 모르겠다.

여기에 외벌이 남편을 서포트하고, 남편과의 노후까지 생각해야 하니 머릿속은 더 복잡해진다.

만일 그 시절 연애 대신 일에 몰두했다면 (혹은 연애와 일 모두 놓치지 않고 붙들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달랐을까? 이런 고민같은 건 할 새도 없이, 방송과 영화를 넘나들며 대본 쓰기에 바쁜 그런 작가가 되었을까? 시어머니와 남편을 당당히 내 영화 시사회에 초대할 수 있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고,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가보지 않은 길이니 이럴까 저럴까 생각만 많아지는 것일텐데...


지금도 나는 맨날 이랬다 저랬다 한다.

일도 육아도 안하는 전업 주부라 내심 당당하지 못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남편 앞에선 여전히 뻔뻔하게 굴고, 어느 날은 글을 쓰다가, 어느 날은 알바의 여왕이 되겠다고 구인 광고를 찾고, 어느 날은 국비지원교육을 알아보는데...

비록 글을 쓰다 디스크가 도지고, 알바를 하다 이석증이 오고, 국비지원을 받겠다고 나섰다 개인정보를 해킹 당했지만, 그래서 아직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긴 하지만... 달리 보면 또 나는 매일 뭔가를 한다.

그러고보면 나는 다리를 얻고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가 아니라, 우아하게 물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물 밑에선 두 발을 허우적대고 있는 백조에 가깝지 않을까.


얼마 전엔 운좋게 알바 지원한 두 곳에서 동시에 연락이 와 면접엘 다녀왔다.

월화수는 빵집, 목금은 돈까스집.

나름 면접 결과가 나쁘지 않아, 빵집에선 남은 빵을 받고 돈까스집에선 알바 후에 맛있는 점심을 먹을 생각으로 좋았는데...

좋았다만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다.




















keyword
이전 02화사람은 겪어봐야 알고  남자는 결혼해봐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