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에서 결혼까지.
그 날의 하루 전만 해도 나에게 남편은 이 땅 어딘가에 사는 모르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 날의 하루 전만 해도 나는 친구에게 농담처럼 소개팅 부탁을 했더랬다.
결혼한 친구나 지인에게 소개팅 부탁을 하면, 언제부턴가 으레 돌아오는 답.
"그러지 말고 동호회 같은 델 나가봐. 인연은 다 있기 마련이야. 조급해 하지 말고!"
조급해 말라는 친구의 말은 나에겐 안달 좀 하지 말라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그러자 내가 한 게 부탁이 아니라 구걸처럼 느껴져, 한없이 구차해지는 기분...
만일 내가 쓰는 대본 속 상황이었다면, 분명 극중의 나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내뱉었겠지.
'조급해 말라고? 그럼 나이 쉰 돼서 조급해지면, 그땐 네가 책임질래?'
그렇지만 정작 현실에서의 나는, 혹 그랬다간 안달도 모자라 발광하는 것처럼 보여질까 아무 말도 못한 채 쓴웃음만 지었다.
연애를 하고싶다고 말하면 주변 사람 열에 여덟은 추천하는 데가 동호회였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나는 애써 소개팅 같은 걸 주선할 생각이 없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봐.'라고 꼬일대로 꼬인 나는 생각했다.
물론 나이 마흔을 코 앞에 둔 모태솔로에게 자만추나 소개팅은 어마무시 한 폭염에 당근마켓에서 패딩을 파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란 걸, 당시의 나도 알았다. 알지만 근데도 이상하게 나는 동호회 같은 덴 끝까지 나가고 싶지 않았다.
왜냐. 목적은 연애(여자)면서 애써 취미로 공통 분모를 만들고 취미 활동인 척 사실은 이성 찾기에 몰두하 는 그들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실은 본인도 그런 사람이면서)
그보다 결정적으로 나는 결국 한 사람과의 연애가 목적이면서 괜히 취미 활동에 시간을 할애하고 애써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그 시간과 노력이 아깝기만 했다. (조급했네) 지금 생각해보면 제사보다 젯밥에 눈이 먼 주제에 제사도 안 지내고 젯밥만 먹겠다는 도둑놈 심보였다 싶은데...
그때는 친한 척이 아니라 정말로 친하게 지내다 좋은 사람도 만나는 데가 동호회라는 걸, 꽈배기였던 나는 알지못했다. 그러니 소개팅을 안해주는 친구는 얄밉고, 동호회는 꼴사납고... 블라블라...
이제사 말이지만 나는 모태솔로일만 했다. 그리고 싫은 것도 많고 꼬인 데도 많았던 당시의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편이 나타났다는 건...
그렇다. 친구의 말이 옳았다. 누구에게건 인연은 있다!!!
O월 O일 그 날. 사실 나는 몇몇이 어울려 밥을 먹는 그 모임에 나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여러차례 여럿이 봐야 하는 동호회와 달리 1회성 모임인데다 모임의 목적이 함께 먹는 밥(사실 나는 인연을 기대했지만)인 것도 나쁘지 않고... 그래서 처음엔 이거다 싶어 냉큼 신청을 했는데...
봄이라곤 해도 여전히 스산한 바람이 불고 해가 짧아 하늘도 어둑어둑 한 3월 초. 게다가 나같은 모태솔로들은 집 밖을 나갔다가도 냉큼 기어 돌어온다는 저녁 8시의 약속이었다.
'가봐야 별 것도 없고 돈만 쓰고 올 게 뻔한데, 그냥 가지마?'
일명 [이불 밖은 귀찮아] 모드가 발동하려는 찰나, 얼떨결에 모드 전환 버튼을 눌러준 건 다름 아닌 엄마다.
"저녁 약속 있다며? 아빠 데리러 역에 갈건데 거기까지 태워다 줘?"
집에서 역까진 도보로 10분. 그것만 차로 이동해도 스사한 밤바람과 어둑어둑 한 밤하늘 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가봐?' 어느 순간 나는 어떨결에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나를 남편과 맺어준 건 다름 아닌 엄마, 남편의 장모님.
그런데 뒤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엄마는 나와 남편의 결혼을 반대한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남자라곤 일로 쓰는 대본의 남주 밖엔 모르던 내가 첫 날 남편에게 대뜸 이런 말을 했다.
"한 번 안아봐도 돼요?"
다시 말하지만 그 날은 우리가 만난 첫 날이었고, 다시 말하지만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남자를 사귀어 본 적 없는 모태솔로였다.
다 지난 이야기이고 원하는 결실을 맺어 지금은 두 사람의 추억이 되었지만, 불과 몇 시간 전 처음 만난 남자에게 안아보겠다라니!!!
만일 대본이라면 캐릭터에 맞지 않는 대사라고 삭제를 요구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남편은 나를 뜨악하게 여겨 다시는 연락을 안했을지도 모르고, 나는 냉큼 집으로 돌아와 주둥이를 틀어잡고 이불 킥을 백 번쯤 했을지도 모르는 상황. 축구로 치면 결정적 찬스에 기세 좋게 날린 헛발질이요, 노래로 치면 잘 나가다 삑사리 임에 분명한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결과가 나쁘면 실책이지만 결과가 좋으면 승부수요 신의 한 수! 내가 던진 그 승부수에 남편은 이때부터 나에게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폈고 우리는 커플이 됐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 나는 남편에게 그때의 나를 어떻게 생각했냐고 물었는데...
"어땠냐고? 솔직히 쾌재를 불렀지. 잘 하면 한 번 잘 수도 있겠다 그러면서 (웃음)"
"(충격) 뭐, 뭐... 라고?"
정리하면 나는 "오늘 즐거웠어요. 조심해 가세요." 대신 "한 번 안아봐도 돼요?"를 돌발 시전했는데, 남편은이를 뜨악 대신 쾌재로 받아들여 오늘의 커플이 탄생됐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정말이지 내가 의도한 건 순수한 허그, 웨스턴 스타일의 작별 인사였다. 나에게 뭔가의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쾌재를 불렀다는 그의 대답은 예상적중이었겠지만, 남편을 만나기 전 나는 나이 서른 여덟의 모태솔로. 이런저런 경험치를 바탕으로 기술을 시전할만큼 정상 범주의 성인 여자가 아니었다.
도리어 경험치는 없는 대신 지난 십여 년 로맨스 장르의 대본을 써 오면서 스스로 자가증식 시킨 상상치만 풍부한, 어찌보면 불행한 작가였는데...
"내가 쓰는 글이 전부 가짜 같아."
언제부턴가 내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이다. 그 언제부턴가가 언제인가 하면, 직업은 작가인데 글쓰는 일로는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해 직업작가인지 아닌지 아리송해지기 시작할 무렵. 글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없어 어디 가서 대놓고 작가라곤 못해도, 출입국 신고서엔 소심하게 writer라고 적어놓곤 했던 그때인데...
사실 나는 속으론 내 자신을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돈을 벌기 위해 설문조사 알바를 하고 친구가 있는 이자카야에서 서빙을 해도, 나는 늘 작가, 현재 하는 일은 작품을 위한 조사며 경험 쌓기일 뿐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 덕에 설문 응답자가 거칠게 전화를 끊어도, 술에 취한 손님이 담배 심부름을 시켜도 웬만해서 절대 주눅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이 작가임을 단 한 시도 의심치 않던 내가 느닷없이 자신의 글을 의심하게 된 이유! 우습지만 그건 순전히 연애 때문이다. 사실은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데 연애물을 쓰는 작가. 상상력에 기대 쓰는 100 % 허구의 내 이야기가 스스로 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작가 일에 발전이 없는 건 전부 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글이고 뭐고 일단 무조건 연애 돌입]라는 자가진단 처방을 내렸는데...
지금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 모드였다.
일단 범죄로 연결될 가능성만 없다면, 일단 크게 비호감만 아니라면, 일단 상대가 좋다고 하면, 나는 무조건 연애에 돌입할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평소 내가 책으로 배운 연애, 상상력으로 써댄 대사들이 묘하게 뒤엉켜 그 날의 나로 하여금 마치 로맨스물의 여주인공 같은 대사를 치게 만들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
뭔가를 손에 넣는 건 늘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특히나 마감 시간 직전 방문한 마트에서 매대에 몇 개 남은 떨이를 고르고 또 고르던 중, 어디선가 종업원이 새 박스를 들고 와 매대에 쏟아놓고 가면, 야~~~호!!!!
이거야말로 득템, 웬떡인가 싶다.
그런데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남편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일단 무조건 연애 돌입] 모드였던 나는 상대가 범죄자는 아닌 것 같아서, 크게 비호감도 아닌 것 같아서, 그쪽이 먼저 사귀자고 하니 사귀었을 뿐인데, 마치 떨이 매대를 뒤지다 새 박스에서 알짜배기를 집어든 것마냥, (내 기준) 남편은 진짜 득템같은 남자였다. 근 사십 년 묵은 모태솔로의 한이 풀리고 기다린 보람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입 밖으로 절로 "야호" 소리가 터져나오기 일보직전였는데...
사실 알고보면 남편은 범죄자도 비호감도 아닐 뿐, 별로 가진 게 없는 평범한 남자. 40대 중소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에 길 가다 마주쳐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지나쳤을 국민 얼굴. 게다가 집도 차도 돈도 없는 3무의 남자였다.
그런데도 내가 남편을 여전히 득템이라 여기는 건, 난생 처음 눈에 낀 콩깍지가 소중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남편은 나의 좋은 점을 알아봐주고 나를 좋아해 준 첫 번째 남자. 그는 나에게 내가 충분히 매력적이고 괜찮은 여자라는 느낌을 갖게 해줬고, 남편을 만나면서 나는 남편도 좋지만 내가 점점 더 좋아졌다.
그래서 나는 그를 평생의 단 한 명 나의 인연이라 굳게 믿었다. 그런데 그런 인연을 떨이 매대를 뒤지다 용케 찾아냈으니 이 어찌 득템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런데 역시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겨... 결혼? 벌써?"
처음 내가 남편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남편이 불쑥 내뱉은 첫 마디. 여지없이 나는 상처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도 그럴 게 내가 이 말을 꺼낸 건 우리가 만난지 약 3개월 만. 우리는 만난지 100일을 기념해 춘천으로 여행을 다녀왔고, 여행을 마무리 하며 서로의 소회를 나누던 중이었다.
"겨, 결혼... 해야지. 나도 하고싶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당시 결혼이 아니라면 연애조차 하지 않을 기세였던 나였기에, 결혼 생각은 없어도 연애는 하고싶었던 남편은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결혼 약속이라도 해야만 했던 걸까.
그러면서 그는 '언젠가'라는 단서가 혹여 완곡한 거절로 느껴질까,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지만 결혼을 생각하는 시점의 차이만 있을 뿐... 블라블라...'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타이밍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결혼을 더 늦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 와 [그래도 100일 만에 결혼 결정은 빠르다 생각한 남편] 그렇지만 사실은 [상대만 없다 뿐이지 늘 결혼을 꿈꿨던 나] 와 [상대가 누구건 결혼 같은 건 생각도 안해 본 남편] 그리고 더 솔직히는 [이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나] 와 [집도 돈도 없는데 무슨 결혼인가 생각했던 남편]의 문제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 했다. 혹 그런 속내를 들키거나 내비치면 지금 하는 연애에 지장이라도 생길까, 두 사람 사이 넓고 깊은 강은 못본 척 그냥 내버려뒀는데...
그렇게 10개월이 흘렀다.
그러다 어느 날, 절대 건널 수 없을 것 같던 그 강을 먼저 넘어버린 건 역시 나다.
나는 강 맞은 편에 서 있는 남편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을지 말지 아무 것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치 넓고 깊은 강에 내 몸을 집어던지듯 이렇게 말했다.
"공동명의 통장을 만들자. 거기다 각자 500만원씩 이체하고, 그걸로 소박한 결혼 준비를 해보면 어때?"
그래도 역시 결혼은 타이밍이다.
나의 제안에 남편은 처음엔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별 말 없이 돈 500만원을 이체했다.
남편은 마침 지난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 500만원 정도가 통장에 남아 있었고, 그 덕분에 돈이 없어 이렇다 저렇다 핑계 댈 일도 없었다며 나이스 타이밍였다고, 훗날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그러면서 속으론 내심 '설마 그 돈으로 결혼이 되겠어?' 생각했다나 뭐라나...
"그럼 그렇게 생각하면서 돈 오백은 왜 준 거야?"
"뭐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우리 즐거웠잖아. 내가 그 정돈 당신한테 해줄 수 있지 뭐 (웃음)"
그런데 남편의 기대(?)달리 그 돈은 결혼을 향해 두 사람이 내딛은 첫 걸음이 되었고, 우리는 무사히 결혼에 골인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나 혼자 내딛은 첫 걸음이고, 남편은 잡은 손을 놓지 못해 결국 나에게 이끌려 결혼식장까지 입장하고야만 셈인데...
참고로 말하면, 우리 두 사람은 당시 1년 남짓 이어오던 연애에 슬쩍 지루함을 느끼던 차였다. 이 또한 서로내색한 적은 없지만, 분명 그랬던 것 같다.
연애도 서로를 알아가는 초반에나 떨리고 설레고 재밌지, 서로를 알게되면 급격히 흥미를 잃게된다. 그러다 영화, 밥, 모텔로 이어지는 뻔한 루틴이 1년쯤 반복되면, 슬쩍 자신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새로운 놀거리가 아니라 새로운 상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기 마련인데...
이럴 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면, 그건 여지없이 파국, 이별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 순간 나와 남편 앞에 새롭게 등장한 아젠다는 새로운 이성이 아니라 결혼이었다.
그 덕에 두 사람은 평소 가지 않던 백화점 가전 매장을 둘러보고, 반지를 구경하고, 이런저런 예식장 투어를 다니면서, 이전과 다른 연애로 다시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의 연애 1기가 마침표를 찍고 연애 2기로 접어든 셈. 그러면서 우리는 1기 때와는 또다른 감정으로 서로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결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연인이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은 그저 연인이기만 할 땐 알 수 없던 연대와 결속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끈끈해진다.
실은 남편도 그걸 느꼈기에 단 한 번의 주저도 없이 나를 따라 결혼식장까지 와줬다고 생각하는데...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뭐야?" 물으면,
"계기? 반지 사고싶어서 따라 다녔는데 그게 그냥 결혼 반지가 됐고, 예식장 둘러보는 것도 재밌던데? 근데 어느 순간 보니까 내가 거기 서 있더라고. 그것도 신랑으로. 아뿔싸... "
늘 진심 같은 건 우스갯소리로 묻어버리는 남편이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내가 모를리 없다. 나 역시 남편의 그 진심을 잘 안다. 그래서 웬만해선 잘 토라지지 않고 웃음으로 받아넘긴다.
그러고보면 이것도 흔히들 말하는 웃음코드? 그렇다면 우리는 웃음코드가 잘 맞는 부부다. 천생연분이니 뭐니 그것까진 잘 모르겠지만, 남편이 웃자고 하는 얘기에 내가 죽자고 덤비는 일따윈 잘 없으니 우리는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부부다.
결혼해서 이제 막 7년. 나라에서 정한 주택청약법에 신혼부부가 딱 7년까지니까, 그래도 우리는 아직 신혼부부다. 40대 곧 반백을 앞둔 늙은 신혼 부부지만, (세상 일에 100%라는 건 없으니 2%를 뺀 약 98%로 정도로) 우리는 잘 맞고 잘 어울리는 부부다... 라고 생각하며 지낸다.
이게 어떻게 한 결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