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너무 다른 부부.
어디 가면 우스갯 소리로 가끔 하는 얘기지만, 처음 나는 남편을 만났을 때 그가 영화 비긴어게인을 좋아해서 세 번이나 봤다는 말에, '옳거니 이 남자다!' 했었다. 영화 보는 취향이 비슷하면 대개는 다른 것도 다 잘 맞고 대화도 잘 통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귀기 시작하고 알고보니 남편은 영화 신세계도 범죄도시도 기본 세 번씩은 본 사람. 그냥 본 거 또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속단하면 안된다. 아직도 나는 내가 모르는 남편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산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남편은 영화도 음식도 취향이 편향돼 있거나 확고한 사람은 아니라서, 대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잘 보고 잘 먹어주는 편인데...
문제는 나다. 남편의 바뀌지 않는 취향, 식습관 때문에 한 번씩 나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영화나 음식 취향이 다른 정도는 적당히 상대방에게 맞추거나 상대방이 없을 때 즐기면 그만인 일. 일예로 남편은 고기파지만 나 때문에 해산물을 먹기 시작했고, 나는 남편이 그닥 좋아하지 않는 면요리는 혼자 있을 때 먹곤 한다.
그런데 함께 식사를 하거나 마트 쇼핑을 할 때가 문제다. 메뉴 선택까지는 별 문제가 없지만, 먹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 답답... 이라고 쓰지만 가끔은 화도 치민다. 이해할 수 없어서다.
뷔페에 갔는데 첫 접시부터 마카롱, 견과류, 치즈 따위를 잔뜩 들고 와 먹고 있다던지, 샐러드를 해줬는데 드레싱엔 버무리지도 않고 채소 따로 토핑 따로 먹는다던지, 아침에도 빵을 먹었는데 점심도 저녁도 빵(혹은 밀가루 음식)을 먹자고 할 때 등인데...
아침도 빵 점심도 빵을 먹었으니 저녁 정돈 얼큰한 국밥이나 백반이 땡기겠지 생각하면 남편은 여지없이, "피자!"
"아 또 빵이야?"
"아 별론가? 그럼 그냥 네가 먹고싶은 거 먹어."
대개는 이런 식. 남편은 결국 네가 먹고싶은 걸 먹을 거면서 묻기는 왜 묻냐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내가 국밥이나 백반이 땡길 때 남편도 똑같이 말해주면... 좀 좋아?! (그렇지만 그런 일은 잘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더 하면, 나는 남편이 습관처럼 사 마시는 편의점 컵커피, 한 주먹씩 먹어치우는 견과류, 한 번 뜯으면 끝장을 보는 과자나 초콜렛 등도 걱정이다.
눈치 챘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음식들은 (빵 빼고) 나는 웬만해선 잘 안먹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컵커피, 삼시세끼 빵, 한 번에 넘치게 먹는 견과류와 초콜렛 등이 몸에 좋을리 없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먹지 말라고 사지 말라고, 어느 순간부터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됐는데...
건강에 좋을리 없다는 건 남편도 잘 알기에 열에 여덟 아홉은 그냥 따르고 넘어가는 편. 그런데 가끔 터지는 한 번이 문제다.
이와 관련해 지금도 기억나는 부부 싸움이 있는데...
씬1. 이마트
초콜렛 든 씨리얼을 카트에 집어넣길래,
나 : 아 뭐 애처럼 그런 걸 먹어?"
그 소리에 장 보는 내내 고개를 꺾고 풀죽어 있던 남편.
그게 또 불편해 계속 캐묻는 나.
나 : 왜 그래? 설마 시리얼 안사줬다고 삐졌어?
남편 : 고구마도 안돼, 시리얼도 안돼 ... 내가 살 수 있는 게 대체 뭔데?"
씬2. 코스트코 (다른 날)
전기구이 통닭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편.
나 : 우리 지하철 탈 건데 저걸 어떻게 사. 냄새나서. 그리고 집에 가면 식어서 맛도 없어.
남편 : 안 사. 그냥 본 거야.
씬3. 집 (며칠 후)
여전히 이마트 때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말수가 부쩍 없어진 남편.
나 : 대체 왜 그래?
남편 : 뭐 그냥...
나 : 그냥 뭔데?
남편 : (한참 뜸 들이다) 내가 힘들게 일해서 몇 천원짜리 통닭 하나도 맘대로 못먹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나 : (속으로만) 갱년기구만...
이러니 나 역시 잔소리를 하면서도 은근 남편의 눈치를 보게 된다. 잔소리이지만 잔소리처럼 안들리게 내 뜻을 전달하고 관철시키느라, 나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 딴에는 건강하게 알뜰하게 나름 생각해서 한 말인데, 그걸 몰라주고 자기 감정에만 빠지는 남편도 한 번씩 원망스럽다.
정리해보면, 보통 열에 한 번 약 10% 꼴로 일어나는 부부 싸움은 앞서 말한 남편의 감정과 이런 내 감정이 부딪혀 발생하는데...
뭐 물론 5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방의 취향이겠거니 봐도 못본 척 넘어가게 된 것들도 많다.
위에서 말한 뷔페 접시가 그렇고, 뭘 해줘도 다 따로따로 먹는 남편의 식습관도 그 중 하나다. 이제는 따로 먹거나 섞어 먹거나, 앞에 먹거나 뒤에 먹거나, 어차피 다 남편이 먹을 것들이니 굳이 잔소리 따윈 하지 않는다. 그리고 빵은 나 역시 좋아하는 부분이라, 많이 먹고 계속 먹는 것만 아니면 대개는 함께 즐긴다. 부부 일상에 빵투어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이밖에도 컵커피나 과자 등 많이 먹어 딱히 좋을 게 없는 것들은 건강을 내세워 완곡하게 말리는 법을 나도 나름 터득했는데...
결정적으로 이제는 잔소리 보다 남편의 다름을 받아들이자 생각하게 된 건, 어느 날 생각지도 않던 어떤 일 때문이다.
그 전날 우리는 내가 하자는대로 치킨을 시켜 먹었고, 그 다음 날 나는 배탈이 나서 하루 종일 동동거렸다. 그러다 속이 비어갈 때쯤 갑자기 또 딸기 생크림 케익이 먹고싶어져 그 말을 무심코 남편에게 했는데...
"먹고싶음 먹어야지. 같이 나가볼래?"
때는 이미 밤 9시가 넘은 시각. 집 앞 백화점은 문을 닫았고, 동네 케익 맛집이라는 카페들은 하나 둘 마감 중이었다. 그리고 케이크가 있어도 딸기가 아닌 초코나 치즈... 모두 내가 원하는 그것들이 아녔는데...
그러자 비슷한 거라도 사주겠다며 동네 편의점을 다 뒤지고 다닌 남편. 처음엔 품절, 그 다음엔 유통기한이 지나 판매불가... 이상하게 평소 쉽게 사먹던 편의점 딸기 샌드위치조차 그 날은 손에 넣기가 힘들었다.
결국 여러 군데를 돌다 다시 동네로 돌아와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간 집 앞 편의점에서야 우리는 딸기 샌드위치를 손에 넣었는데...
딸기 샌드위치를 남편에게 건네받는 순간 뭔가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만일 남편이 지금 나처럼 밤 9시가 넘은 시각, 딸기 케익이 먹고싶다고 했으면 나는 어땠을까?'
아마도 나는 내일 사다 먹자고, 아니 어쩌면 솔직히 이 시간에 미쳤냐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때도 예전에도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늘 함께 해주려고만 했지 반대한 적이 없다. 느닷없이 딸기 생크림 케익이 먹고싶다고 했을 땐 한 밤에 나가 온동네를 함께 찾아헤맸고, 내가 잘 먹는 과자가 생기면 퇴근길엔 그 과자만 양껏 사다 싱크대 상부장에 넣어줬다. 그리고 남편은 늘 내가 사겠다고 하는 건 무조건 많이 사고 비싼 걸로 사라고 말해주는데...
물론 성격의 차이도 있다. 그렇지만 역시 남편은 나보다는 넓고 관대한 사람이다.
비긴어게인도 좋아하지만 신세계나 범죄도시도 좋아하는 게, 그러고보니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부부. 보통은 비슷한 줄, 통하는 줄 알고 하나가 되지만, 살면 살수록 다른 사람이고 별 개의 사람이다.
특히나 나이 마흔을 넘긴 남자, 혹은 여자는 웬만해선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함께 할 여생, 부부는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수 십가지가 달라도 한 두가지가 너무 비슷하고 잘 통해 여전히 함께 하는 게 즐거운 부부다.
우리에겐 여행과 빵이 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할 때 우리는 그 어떤 부부보다 죽이 잘 맞고 즐겁다.
돈이 들고 건강이 상할까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부부 인생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는 역시 여행과 빵이다.
우리는 서로 달라 부딪히고 다퉈도 여행과 빵만 함께 하면 도로 괜찮은 부부가 된다.
다름과 다툼 따윈 그냥 일상의 한 부분으로 묻어버리고 다음 즐거움을 찾는다. 나는 이렇게 반복되고 쌓여가는 우리의 시간들. 남편과의 시간이 참 좋다.
참고로...
치킨이며 케이크가 갑자기 땡기고, 소화가 안돼 동동 거렸다 식욕이 미쳐 날뛰기를 반복하고...
대본이었다면 영락없는 임신. 임신을 위한 니쥬 깔기처럼 읽혔겠지만, (그리고 나도 내심 기대했지만...) 역시나 아녔다.
임신 희망고문 당하며 맛나게 먹은 딸기 샌드위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