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으로 귀환하는 비행기에서 착륙을 예고하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야간 비행 중인 나는 반사적으로 창문 밖으로 에펠탑의 불빛을 찾는다. 5층 높이의 석조 건물들 사이에서 300M의 높이를 뽐내는 저 유명 철탑의 이질감은 내가 얼마나 먼 이국 땅에 나와 사는지 알려주는 상징물이기도 하지만, 360도로 쏘아내는 레이저 빛을 보고 있으면 망망대해의 유학 생활 속에서 매번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말해주는 등대처럼 느껴진다. 크고 작은 현실의 어려움에 부딪혀 만선의 꿈이 좌절될 때마다 촘촘한 조명 옷을 입은 저 금빛 철탑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 도시에 장기간 거주한 이들은 종종 에펠탑은 더 이상 감흥을 주지 못한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러나 더러는 주변 나라를 아무리 여행해 보아도 파리로 돌아오는 길이 여정에서 가장 설레는 일이며 야간의 에펠탑을 나처럼 일종의 항로표지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에펠탑을 둘러싼 미학적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파리가 파리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상징물이자 지표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러한 주장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근대 프랑스의 위상을 높인 인물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세 명이 있다. 빅토르 위고, 루이 파스퇴르, 귀스타브 에펠이다. 위고는 문학에, 파스퇴르는 생명 과학에, 에펠은 산업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에펠탑이라는 이름이 바로 이 철의 남자라는 별칭을 가진 귀스타브 에펠에게서 온 것이다. 마천루가 즐비하는 오늘날 에펠탑이 위용을 떨치기는 쉽지 않지만, 약 7,300톤 규모의 이 철제 문화유산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여겨지는 워싱턴 기념탑이나 독일의 울름 대성당보다 무려 두 배가 더 높았다. 철은 산업 혁명의 주역이었지만 주인공이었던 적은 없었다. 에펠의 대표작 중 하나가 뉴욕 리버티섬의 자유의 여신상이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여신의 뼈대를 볼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철이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정확한 비례미와 격자무늬 형태를 뽐내며 비정상적으로 높이 솟아오른 사건은 시민들로 하여금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일으켰다. 약 2년 동안 진행된 에펠탑 건축의 슬로건이 ‘더 빠르고, 더 높고, 더 강하게’ 였으므로 이것은 철이라는 물성 자체가 가진 미래를 향한 당찬 메시지 이기도 했다.
소위 모더니즘의 문이 열리던 그 시기는 모네, 드가,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파리 살롱의 박해를 이겨내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때 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130년이 흘렀고 ‘관광 대국'으로 불리는 프랑스는 여전히 그 시대 유산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의 파리는 혁신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던 그때와는 자못 다르다. 발전된 도시를 가리는 지표는 다양하지만 행정, 교통, 인터넷 등의 속도에 관한 부문이라면 창피를 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선진 문명의 기대를 품고 파리에서 얼마간의 낭만적인 밀월 기간을 보내고 나면, 이 도시를 대표하는 에펠탑 발치에서 화려한 조명옷을 입기 전 회갈색의 거대한 철덩어리 민낯을 마주해야 할 때가 온다. 그제야 우리는 이 도시의 본질을 볼 준비가 되는 것이다. 본래 만국 박람회를 위해 기획된 20년 수명의 이 거대한 설치미술은 철거를 피하기 위해 잠시나마 송수신탑으로 쓰인 적이 있다지만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목적과는 줄곧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에펠의 구조물은 장수를 누리며 사회적이고 예술적인 보다 넓은 차원의 가치와 지위를 획득했다. 그리고 오늘도 도시를 대표하여 질문한다. 우리가 향해야 할 미래는 무엇인가.
*파리의 한인 주간지 '파리광장'에 연재중인 글입니다. (발행일 2024-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