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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Mar 19. 2022

눈 오는 날의 단상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이 온다.

난 첫눈이 오는 날 태어난 겨울아이다.

어릴 적 앨범을 넘기면 커버를 넘기자마자 A4 분량의 엄마의 손글씨가 들어온다.

내가 태어난 날의 기록이 담긴 엄마의 일기다.

‘첫눈처럼 우리에게 온 예쁜 아가’라는 엄마의 첫인사로 시작된다.

내가 겨울 아이라는 걸 떠나서라도 눈은 예쁘다.

첫눈은 설렘도 가미되어 더 예쁘다.

오늘의 눈은 지난겨울의 마지막 인사일 테고, 봄을 환영해주는 팡파르 같기도 하다.

산불 피해 지역에도 선물이 될 것 같다.




겨울 그중에서도 눈 오는 날이면 잊지 않고 듣는 김광진의 ‘눈이 와요’와 작년에야 알게 된 자이언티의 ‘눈’을 번갈아 듣고 있다. 지난겨울 내내 눈멍 OST 삼아 줄곧 들었다. 마음 위로 눈이 내리는 기분을 만끽한다. 


눈이 오면 생각나는 백석의 시도 웅얼거린다. 암송하며 입에 붙은 좋아하는 시다.

기억을 거슬러가면 외부 워크숍의 뒤풀이다.

하나둘 사람들이 장소로 모이고, 때마침 오브제처럼 첫눈이 오기 시작했다. 

누구라고 할 거 없이 저마다 폰으로 사진과 영상을 남기고 혹은 누군가에게로 전송했다. 

그리고 소회를 나누는 시간이 다가왔는데, 이상하게 노래를 청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눈 기운에 다들 센티해졌나 보다. 

내 순서가 되었고, 나는 좋아하는 시로 노래를 대신하겠다 했다.

호기롭게 택한 시암송은 의도치 않게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사실 집중을 원하지 않았다.

편안한 마음을 먹고 있던 낭송이 긴장으로 탈바꿈하고, 고요 속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암송을 시작했다. 내 숨소리 떨림 하나하나까지 생중계되는 거 같다. 몇몇이 함께 따라 낭송해주면서 나의 노래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좋아서 암송하는 시 중 하나다.

특히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마성의 대목은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이다. 지금도 이 문장을 사랑한다.

보조사 ‘은’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
나타샤를
사랑'을' 하고도 아니고
사랑'하지만' 도 아니고
사랑'은' 하고라니


그 한 줄에 어찌할 수 없는 남자의 애달픈 무기력함이 묻어난다. 옆에 있었다면 포기하지 말라고 어깨를 다독이며 힘을 북돋아주고 싶은 꼭 그런 마음이다.

보조사 '은'의 화룡점정 테크닉. 백석은 천재다.

가난하면 어떻고 산골로 가면 어때

이렇게 사랑하는데…


눈 by 자이언티 (출처: J-two music Youtube)
눈이와요 by 김광진 (출처: 김광진-주제 Youtube)




사랑이 뭘까? 싶다가 책을 읽다 채집해둔 문장 모음에서 사랑과 관계에 대한 메모를 남겨본다.

오늘 같은 날 다시 꺼내보기 좋은 글들이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 _ 생떽쥐베리

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상대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을 때 싹튼다 [P14] 
- <사막의 도시> 중에서


우리는 사랑일까  _ 알랭 드 보통

앨리스가 지금 에릭을 [신중하게 말해서] 사랑하는 것일 리가 없다면, 그녀는 아마 사랑을 사랑한 것이다.


에릭이 배터시 다리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구두끈을 맬 때, 앨리는 ‘구두끈을 매는 모습이 귀엽잖아?’라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귀엽게 구두끈을 매는 시람을 찾아내다니 이게 꿈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다 [P74]


나란 무엇인가 _ 히라노 게이치로

지속하는 관계란 서로가 주고받는 헌신이 아니라 상대 덕분에 각자가 스스로 느끼는 어떤 특별한 편안함이 아닐까?  [P170]

 

행복의 기원 _ 서은국

왜 이토록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할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막대한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생존. 세상에 포식자들이 있는 한, 모든 동물의 생존 확률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을 때 높아진다. [P81]


그래, 사람은 서로가 필요하다.

어떠한 속성의 관계인지를 따지기보다 우리는 함께할 때 행복하다.

그리고 인연은 돌고 돌아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마주치게 되는 거라 하던 친구의 말이 생각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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