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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Mar 25. 2022

내일도 오늘처럼 너의 아침이 온다

[문장우리기] #1.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by 이어령

이어령 선생님의 영면도 한 달로 접어든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참 특별한 분이셨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공식을 넘어 시대를 초월하는 혜안과 총기를 나누던 분이었지 싶다.

특히나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모든 삶은 완전하지 않다.  

세상의 지성을 다 가진 분이었지만 딸을 먼저 보낸 아비로서는 순도 100의 행복은 아니었을 거 같다.

세상이 알아주는 멋진 삶에도 나는 슬픈 역사에 자꾸 눈이 간다.

그래도 그런 세상을 고약하다 염증 내지 않고 다 품고 살아가셨으니 그 속은 오죽하셨을지 싶다.

그 시간을 치르던 이어령 선생님의 꾹꾹 누른 슬픔이 고요해 더 안쓰럽다.

무엇보다 죽음 앞에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하고 담백했던 그의 딸 역시 아버지의 딸답다. 멋지다.

그런 딸을 또 유년을 담담히 그리고 있는 선생님의 유고시집을 샀다.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 그 길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마지막을 목전에 두고 딸을 만나러 갈 마음의 채비를 하고 계셨던 거 같다.

죽을 때 나는 웃고 남들이 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셨듯 본인의 이상대로 살다 가신 거겠지.


지나고 나면 남는 게 후회이듯 시집 곳곳에 딸에 대한 회한과 미안함, 그리움이 배어있다.

그 안에는 꿈에서 깨어나도 그대로인 현실에 홀로 울음을 쏟아내던 그분이 있다.

시를 읽으며 나도 따라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건 죽음이 주는 가장 큰 고통이고 불편일 것이다.

그것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극복되어지는 것일 뿐이다. 결코 괜찮지 않은 일이다.


선생님은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우리의 삶이 더 농밀해진다고 했다.

'너에게는 오늘이 전부야’라는 걸 알았을 때
역설적으로 말해서
가장 농밀하게 사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나쁜 일만은 없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먼저 떠난 이들과의 해후를 연결하는 현실적인 거라 생각하셨던 것처럼 죽음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생의 한가운데 있는 준비된 것이었대도 막상 마주친 순간에는 당신도 조금은 두렵지 않으셨을까 싶다. 반면 딸과 어머니를 만날 생각에 아이처럼 들뜨고 기쁘셨겠지.


어머니는 절대로 내 기억 속에서 돌아가시는 법이 없다고...

여든이 넘은 지금도 기쁜 일이 생기면 '엄마, 나 이거 해냈어.'라고 속으로 중얼거린다던 이어령 선생님의 그리움은 표정이 있다.

슬프다기보다는 따뜻하고 복합적이다. 그리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날아가 안긴다. 손을 잡는다.

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도 그러하다.

그가 사유했던 죽음을 자신보다 먼저 경험한 것도 딸이었고, 자신의 생에서 소중한 첫 생을 안게 해 준 것도 딸이었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듯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도 모범답안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나'의 이야기로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근간이 될 뿐이다.


너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무미건조함의 살은 방어 불가로 쉽게 베일 듯한 선생님의 질문처럼  

나답게 나만의 이야기로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나를 알아가는 글을 쓴다. 나를 위해 쓰고, 내가 좋아서 쓴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남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다시금 내가 많이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고 행복을 느낀다.

그렇게 살아간다. 그 곁으로 그 분이 찾아낸 생의 진실이 맴돈다.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중략)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것이
다 선물이더라고.


두고두고 일리 있는 말이다.

내가 받은 선물을 감사히 여기고 소중히 다루며 오늘을 살겠다 생각한다.

오늘 하루는 좀 더 길고도 좀 더 농밀할 거 같다.

그리고 이 시간 하늘에서는 사랑했던 딸과 어머니와 즐겁게 추억하고 계신 선생님이 계셨으면 좋겠다.




#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시집 중에서

P70

생각하지


'사랑'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생각'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생각한다는 것을 사랑한다고 했지요.
희랍말도 그래요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오래 생각하는 것이고, 참된 것은 오래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줍시다.
어머니가 읽어준 동화 한 편, 어머니가 불러준 노래 한 곡조, 어머니가 꽂아준 꽃 한 송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갖지 못한 이처럼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P91

마음


마음이 뭐니
눈으로 못 보는 것

아니야
엄마는 네가 화난 것을 볼 수 있는데

마음이 뭐니
귀로 듣지 못하는 것

아니야
엄마는 네가 즐거운 것을
웃음소리로 들을 수 있는데

마음이 뭐니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

아니야
엄마는 네가 슬퍼할 때 손끝으로
네 눈물을 만질 수 있는데

마음이 뭐니
대답하지 말아

새 천년은 사람들 마음이 바뀌는 거야
볼 수도 없지만
들을 수도 없지만
그리고 만질 수도 없지만

새로운 즈믄 해가 오면
온 세상 마음이 달라진 것을
엄마처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가 있어요.

P161

만우절 거짓말


네가 떠나고 보름
오늘은 4월 1일
그게 만우절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구급차에 실려 간다는 말
심폐소생을 받고 있다는 말
간호사의 말 의사의 말
그 말 그 말들이

모두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너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쓰거라
미안해요 다 거짓말이었어요
나는 지금 여러분과 함께
4월의 봄을 맞이하고 있어요

만우절 미안해요

나의 죽음은 말도 안 되는
만우절의 거짓말이었지요.

P172

기억 상자


바람개비는 바람의 상자
조개껍질은 바다의 상자
너는 내 기억의 상자

차양이 넓은 하얀 모자 아래
흔드리는 그네 위에

조개껍질 같은 작은 신발 속에
상자 속의 너는
언제나 작은 목소리로
'아빠'라고 부른다

목도리를 두른 겨울 기억들은 따뜻하고
등에 업힌 너는 체중이 없다

바람개비는 바람의 상자
조개껍질은 바다의 상자

너는 내 기억의 상자

P147  

오늘도 아침이 왔다


오늘도 아침이 왔다
까맣던 밤이 가고
어제 울던 까치가
마당에 왔다

눈부신 햇살이 이부자리를 개는데
네가 누운 자리에도 아침이 왔다
먹지 못해 머리맡에 둔
사과처럼 까맣게 타들어가도
향기로운 너의 시간

오늘도 아침이 왔다
민아야. 어제처럼 또 아침이 왔다
달리다 굼*!
눈 뜨고 일어나 학교에 가야지

빨간 가방 등에 메고 인사를 해야지
어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손을 흔들고 처음 익힌 한글로 책을 읽듯이
가슴에 메아리치는 너의 목소리

보아라 향나무 연필처럼 조그만 키로
너 거기 있다
한 뼘도 안 되는 빨간 가죽 구두가
내 신발 곁에 있다
달리다 굼
어서 일어나 다녀오너라

세발자전거 타고 바퀴를 돌리듯
힘차게 페달을 밟아야지
아침 공기가 너의 폐를 가득 채우면
풍금을 울려 찬미가를 불러야지

저녁 인사는 하지 말거라

내일도 오늘처럼 너의 아침이 온다.

Crossroads (Original Ver.) by Bone thugs N harmony (출처: krayzie47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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