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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Mar 08. 2022

식도락의 유희를 이기는 커피 한 잔

사랑의 단계처럼

루틴이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견고함 같다.

하루 세 끼 밥을 찾듯 하루 세 번 커피를 마신다.

그것도 그 시간을 제대로 즐기면서...


그중에서도 모닝 커피로 시작하는 아침을 좋아한다.

여행 중 탁 트인 시야로 바다가 보이거나 사방의 통창이 초록초록한 가운데 마시는 내 취향의 커피 한 잔은 무릉도원 저리 가라다.

지난 봄 청보리밭 뷰의 한 카페에서 Photo by 지운

다만, 이런 루틴은 위에 통증이 오면서 일부 금이 갔다. 

그렇다 보니 이왕 마시는 한 잔을 더 잘 즐기고 싶단 생각이 커졌다. 

자연히 나의 커피 한 잔은 식도락의 유희를 이길 때가 많다.


낯선 동네를 걷다 커피 생각이 날 때, 카페의 생김새나 이름, 주인의 커피 내리는 광경, 하다못해 간판만 보아도 맛이 좋을지 아닐지 감이 온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나랑 맞을 지 아닐 지.

반대로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들어간 카페의 커피 맛이 좋을 때의 쾌감이란 얻어 걸린 행복에 하루를 잘 산 거 같은 기분과 진배없다.


가급적 프랜차이즈는 피하는 편인데, 맛도 공간도 단조롭게 느껴진다. 여기에 별다방 커피는 나의 취향이 아니다. 다른 걸 다 떠나 맛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여럿 만남에 내 개인의 취향을 고집하는 성격도 아니어서 그 경우 사람들이 원하는 곳으로 따르는 편이니 그 루틴마저도 변수가 따른다.




한창 커피에 매료되었을 당시 홍대에 있는 한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기도 했다. 

핸드드립은 공이 많이 드는 만큼 과정이 예민한데, 라테 아트가 유희라면, 핸드드립은 일종의 다도와도 같다.

원두 부풀리기가 관건인데, 주전자의 얇고 긴 주둥이로 물이 떨어지는 양이나 속도가 모두 영향을 준다. 

물에 닿은 원두가 이스트에 빵처럼 잘 부풀어 오르는 게 포인트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방향을 번갈아가며 달팽이관 그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깔끔한 풍미의 커피 한 잔이 완성이다. 

선생님이 시범을 보이실 때는 풍선처럼 잘만 부풀던 녀석들이 내가 하면 납작한 엉덩이를 잘 들어주지 않았다. 반면 에스프레소는 템퍼로 누르는 강도도 맛을 좌우하는데, 크레마가 생명이기도 하다. 잘 만들어진 크레마는 (호랑이 줄무늬를 닮았다 하여) 타이거 벨트라 부르는 부메랑이 만들어진다.

당시 애정을 충만히 장전하고 임하는 만큼 과정에 진심도 깊었다.

지난 일기에서 찾은 설렘을 다시 대하니 이건 마치 다시 찾은 사랑 같다.

사랑의 단계에서 발단이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 같아
커피와 차를 사랑하는 나는
단계의 예우를 갖추기로 했다.

첫 시간은 커피 이론과 페이퍼 드립 추출.
숨을 가다듬고 카리타에 물을 붓자
이스트를 머금은 빵처럼 커피 가루가
부풀어 오르고
커피 향이 춤추듯 공간을 날아다닌다.
내 기분은 더 좋아진다.

떫은맛을 남긴 나와 달리
언니는 실장님도 극찬한 맛 좋은 커피를
추출해 내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몸과 입 안 가득 커피 향이 배어들고
우린 커피 향 나는 여자가 되어 웃고
사진을 찍었다.

2009.3.13 일기 중에서


커피에 대한 관심으로 재미있게 읽은 <커피견문록>을 보면 커피의 다양한 역사처럼 커피를 바라보는 시선도 대우도 천지 차이다.  

Photo by 지운
- 하레르에서는 커피콩이 오랜 세월 권력의 상징이었다. 커피를 재배하는 계급은 시의 이름을 따서 '히라시'라 불렸을 뿐 아니라 커피 재배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 시의 출입을 통제했고, 왕족의 수석 경호원은 사적 공간인 작은 커피 정원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는 그의 높은 지위를 증명하는 셈이었다.
- 도취의 수단으로 커피를 돌려마시며 신과 소통한 수피교도가 커피를 신성한 각성제라고 여긴 반면, 메카 전역에서는 얼토당토 않은 억지 가설로 전역에 커피가 금지되었는데, 메카에서 카이로, 카이로에서 터키로 탄압이 전이되면서 그 강도도 더 거세졌다. 1511년에 시작된 탄압은 모스크 옆에서 남자 여럿이 모여 취한 듯 카와(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목격한 이슬람교도인 경찰 우두머리가 사람의 정신을 흐리는 사악한 음료를 이유로 공청회에서 커피 금지를 주장했고, 의사를 돈과 권력으로 매수해 무서운 효능을 지닌 것으로 거짓 증언을 시키기도 했다. 커피를 두고 정치적 연출까지 등장한 셈이다.
- 역대 술탄 가운데 가장 악독했던 무라드 4세는 커피 마시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는데, 한 명의 Coffee person으로서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싶다. 커피를 마시다 걸리면 몰매를 맞거나 죽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잔인하고 거센 탄압에 카페가 줄줄이 문을 닫기도 했다. 실상 그가 가장 우려한 건 커피 자체가 아니라 커피점이 백성들에게 만남의 장을 제공해 진지한 토론을 이끌어 낸다는 사실이었다. 시국을 논하며 다양한 문제를 두고 정부를 비판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염탐하면서 위기를 느낀 것이었다. 갖은 악행을 일삼다가 정작 본인은 알콜중독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생각할수록 이상하고 나쁜 놈이다.
- 유럽에서는 음주가 사회적 지위나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과히 성행하면서 음주를 제한하려는 반대 세력도 생겨났는데, 마땅한 대안이 없던 중 커피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10년 세월에 묽어지면서 유럽 최초의 커피점이 영국 옥스퍼드에 문을 열었다. 곧이어 런던에도 카페가 생겼는데, 커피점은 일터에서 정신을 맑게 하는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영국인에게 만남과 대화의 장소로서 술집이 아닌 새로운 장소를 제공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우리에게 익숙한 카페의 모습을 갖춰가던 시기다.

그 외에도

- 실존주의자 샤르트르가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아침부터 밤중까지 앉아있던 지독한 손님이었다는 설  
- 아침식사마다 커피를 마시던 베토벤은 커피를 만들 때면 동양인처럼 정성을 쏟았는데, 커피 한 잔에 원두 60알이 들어갔고, 특히 손님이 온 날은 낱알을 일일이 세느라 바빴다는 일화
- 커피점에서 사람들이 주고 받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 데 모아 주간지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 당시 영국의 작가들이 문학적 이상을 구어체로 그리고 세련된 문체로 풀어내는 방법을 배운 곳이 바로 커피점이었다는 설  

등 커피광이자 저자인 스튜어트 리 엘런의 집요한 모험 속에 커피에 얽힌 갖가지 이야기가 흥미롭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정신을 흐리게 하는 그을린 물로 탄압받던 커피가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여유가 생겨나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이야기를 키우며 오늘날의 카페로 발전해 온 것일 텐데, 나 역시 커피를 즐기는 데에 6할이 커피 맛이라면, 나머지 4할은 커피를 즐기는 분위기다.  예전 어느 카페 벽에 쓰여있던 문구처럼 그 분위기란 '함께' 하는 데에 있다. 

It's not the coffee. It's the people.


결국 예나 지금이나 커피는 사람을 모으고 이야기를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스런 나의 루틴이고.



나는 카페가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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