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갈이와 이직의 상관관계: 목숨을 건 수명 연장의 시도
9월의 늦은 오후, 낮잠을 마친 거실에 새근새근 바람이 불어왔다. 제법 열기가 식어 기분을 좋게 하는 바람에 자꾸만 나른해지기를 반복했다. 어제 새벽에 켠 무드등이 햇살에 숨어 살아있었다. 운전할 때, 책을 볼 때, 게임할 때 꺼낸 안경이 세 개나 밀려 겹쳐 있다. 여인초를 어루만지는 커튼같이 머리칼이 눈가를 간지럽힌다. 아직 몽롱한 기운에도 한 가지 사실이 선연해진다. 가을이 왔다.
잘 살던 놈을 뿌리째 뽑아서 사지만 남기고 알몸째 탈탈 털어 더 큰 데서 살도록 옮기는 것. 인간은 뾰족삽을 들고 웃으며 그것을 ‘분갈이’라고 칭하지만 식물 입장에서 보면 여간 잔인한 게 아니다. 금방 잘 적응하는 종도 있지만 몇 주간 몸살만 앓으면 다행이죠, 까딱하면 죽어버리기도. 그래서 분갈이는 외관성형도 아니요, 아파트 평수 넓히기도 아니요, 그저 생명을 건 수명 도박에 가까운 짓이다. 내 이력에도 레위시아와 무늬싱고니움같이 울면서 떠나보냈던 몇 차례의 이직과 실패가 있다. 그럼에도 바로크벤자민이나 옥시바리처럼 어떻게든 살아남아주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힘이 난다. 주인도 모범을 보일게! 라 하기에는 식물로부터 내가 배운 것이다.
잠깐 바람을 쐬주려 옮기는 중에도 부드러운 신엽이 툭툭 떨어진다. 새 잎이 옹글옹글 많아서 너무 기뻐하다가, 내 손으로 반은 죽여버린 것 같아서 슬퍼하다가. 어느 날 차 안에서 코인이라도 잃은 사람처럼 잎에 대해 얘기할 때 남편이 그랬다. “에이 또 자라겠지” 아무렴 가지 끝마다 셀 수도 없이 잎을 틔우곤 있었다. 떨어진 잎이어야 오밀조밀 만져볼 수 있으니 괜히 아픈 것만 곱씹기 바빴던 것이다. 앞으로는 약한 잎은 어차피 떨어질 일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난 일 말고 앞으로를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