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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Mar 02. 2022

[프리즘] 메타ㅇㅇ시대에 주체성 찾기

자아가 너무 많아서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프리즘


생명이 쏘아 올린 유리공은

방향도 모르고 굴렀다


성주산 지날 땐 물푸레나무를

서해 지날 땐 조개가루 섞인 백사장을

투명한 마음으로 투영한

즐거운 변형


어느 여름 뙈양볕과

색색의 수영복이 뒤섞여 만든

어지러운 프리즘에


둥근 머리 뜨거워져

왈칵, 눈물처럼 짠 해수로 간다


고요한 태평양의 한가운데로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곳으로

그 어떤 굴절도 없는 곳으로



우리는 너무 쉽게 성격이 결정된다. 유아기엔 부모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청소년기엔 어떤 친구와 어울리는지에 따라, 대학생 때는 어떤 동아리나 소모임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나쁜 친구를 사귀면 나쁜 물이 든다'라는 말을 31세가 되어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비단 청소년 시기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만 해도 그렇다.


나는 30년간 물처럼 살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좋아하는 친구가 있으면 꼭 붙어서 그녀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을 배우는 걸 좋아했다. 그렇다고 손민수처럼 사생활을 침해했던 건 아니고, 예를 들면 독립적인 성향이 강해서 혼자 쇼핑하는 걸 잘하는 아이와 같이 살 때는 내가 외로워도 종종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말이 잘 통하는 친구가 싫어하는 영화는 나도 애초에 좋아할 마음 없이 시청했다. 쪼르르 달려가서 나도 그 영화 별로였어, 라며 칭찬을 받거나 동질감을 느끼려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곧 나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나는 색이랄 게 없으니까 옆 사람의 색을 빌려 살아왔던 것 같다. 카멜레온처럼.


주변에 사람이 많은 대학생 시절까지는 별다른 이슈가 없었다. 문제는 직장인이 되고 친구들과도 멀어져 점점 사회에서 개인이 되어가고 있을 때 나타났다. 회사에서는 어떠한 업무에 대한 책임이나 직급으로나마 내 정체성을 설정하고 시간을 보냈으나, 퇴근하고 나서는 길거리나 텅 빈 방에 혼자 머무르기가 두려웠다. 어떤 매장에라도 들어가 손님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 없는 물건을 산 적도 있고, 무작정 유행하는 게임에 현질을 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저 3차원의 세계에서 나로서 존재하는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유독 물 같은 사람이 있다. 나 말고도 더 심한 친구들도 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하고 술에 타든 먹에 타든 잘만 지낸다. 사회생활하기 편한 것 같지만 집에 돌아와 누워 있으면 가슴속이 휑할 것이다. 색깔도 없이, 그저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있는지 희미하기만 할 것이다.


최근에는 명상하는 빈도수를 늘렸다. 스마트폰도 나려놓고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그저 고요한 공간에 6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물리적인 신체가 존재함을 피부로 느끼는 데에만 집중한다. 그러면 조금씩 내 자신이 느껴진다. 나의 존재를 알고 내가 낼 목소리를 정한다. 30년이나 살고 나서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을 시작하는 느낌이지만 꽤나 새롭다. 누구나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재미있기까지 하다.


여자 친구 노래가 생각나는 밤이다.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깨지진 않을 거야. 그때는 유리구슬이 그저 청순한 이미지로 보였다면, 지금은 쉽게 깨지지 않을 거라는 그 견고한 다짐에 눈이 간다.


가사를 곱씹으니 어떻게든 살아온 내가 대견스럽다. 비록  아직도 메타버스와 가상세계가 분수처럼 넘쳐나는 세상에서 온통 왜곡된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이렇게 가끔 정신을 차리고 뭔가를 깨닫는 날이 오기도 하니까. 앞으로는 자신을 더 관찰하고 아끼며 꼼꼼히 색칠해가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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