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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Oct 31. 2022

[온종일 카페] 아주아주 천천히 가는 시간

'그냥 살 뿐인 멋진 하루' 보내기


온종일 카페


출근보다 이른 외출

볕이 좋아 종종대는 걸음


아는 카페를 가는 마음

뻔한 메뉴에도 취향을 묻는 직원과

찡긋대며 주고받는 눈웃음


대화창으로 꽉 채운 노트북

한 단락씩 읽고 덮는 산문

잠들지 않는 나른한 졸음


자꾸만 보게 되는 날씨

따라 부르진 못해도 아는 노래

그걸 따라 부르는 뒷자리 아저씨

충천 중인 에어팟


아주아주 천천히 가는 시간

그 따분함 속에 은근히 살아있는 나


떠오르는 옛날 말

너만 행복하면 돼 누가 뭐라고 해도

너 자신을 방치하지 마


그 따뜻함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나




사실 나는 '혼자 카페' 문화에 익숙지 않다. 목적 달성형 인간인 데다 30대에는 일중독자까지 돼버렸으니 혼자 여유로운 시간을 마주하면 안절부절못하기 마련이었다. 어제저녁에는 '혼자 집에 있지 못하는 내'가 공연히 서러워서 잘 밤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자려고 누웠던 짝꿍은 내가 '흑'하고 울 때마다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그렇게 싫어서 우는 31세라니요?"하고. 그럴수록 나는 더 서럽게 울고 짝꿍은 더 크게 웃었다.


오늘 아침에는 노트북과 책, 물건 몇 가지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집에 혼자 있기가 죽기보다 싫어 그랬지만 꽤나 명분은 있었다. 신나는 자가격리 해제일이자 누군가는 그토록 바라는 한가한 연차일. 그리고 어제 울 때 마침 친구가 보내준 메시지. '너를 먼저 돌봐'

맞다. 그 아늑한 집이 뭐가 문제랴. 실은 일이 아니라, 짝꿍의 껌딱지가 아니라 온전히 나로서 있는 것을 두려워한 것일 테다.


나는 카페 앞에 도착하고도 바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상쾌한 바람과 가을볕, 어제도 방충망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힘껏 염탐하던 이 계절과 날씨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딱히 나무도 산책길도 없는 동네를 두 시간 넘게 걸었다. 거의 대부분의 지성인은 걷는 것을 즐겼다고 했던가. 혼자만의 시간이 달갑지 않았던 마음이 가을볕에 사르르 녹았다. 반짝이는 나뭇잎은 어제 본 영화 <소울>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근처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과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야 나는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직 손님이 없어서 간밤에 소복이 눈이 쌓인 마당에 온 것 같았다. 한 번, 두 번 자리를 옮겨서야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았다. 오른쪽으로, 아래로 콘센트가 있고 유리창을 바로 볼 수 있는 창가 자리는 역시 노트북 자리로 제격이었다.


 음료로는 체리콕을 골랐다. 재료도 무난하고 커스텀할 필요도 없는 따분한 음료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단 거 좋아하세요, 상큼한 거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이 날아들어왔다. '달달한 거와 상큼한 거'도 아니고, '단거와 새콤한 거'도 아니고, 왠지 상큼이라는 단어가 성큼 상큼하게 다가와 나도 모르게 한껏 상큼한 표정과 톤으로 '상큼한 거요'라고 대답했다. 친절하면서 날렵한 주인은 '그럼 상큼하게 해 드릴게요!'라고 답했다. 물론 코 찡긋도 잊지 않으면서. '이거 완전 현대판 지은탁이잖아!'라고 어느 유튜버 톤으로 속말을 외치니 기분이 좋아졌다.


 자리에 앉아서는 위 시에 나열한 것처럼 지루하면서 재미있는 일을 하는 중이다. 간간히 오는 업무연락은 생략했지만 그만큼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면서. 처음엔 어쩐지 좀이 쑤시고 차라리 산책을 더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한 시간쯤 앉아 있으니 나른함이 몰려왔다. 책을 읽다가 어색하면 인터넷 서핑을 하고, 서핑하다 심심하면 열심히 카톡을 하고, 답장이 없으면 잠깐 창밖을 봤다가, 옆 테이블 하는 소리를 들으며 한 번 끼어들어볼까 생각도 하다가, 친구에게 전화도 걸어보다가...


아주 작고 소소한 일을 하는 가운데 한동안 세상 떠나가라 읊던 노랫말이 생각났다.

과나의 <사람이 되기 싫은 곰>에 나오는 가사. 


안녕, 그냥 살뿐인 멋진 하루
인간 되면, 성실하고 올바르게나 살겠지
안녕, 겨울잠과 나무 등 긁기
엄마 아빠의 푹신한 털도 모두 다 안녕

나만이 아는 숲 속 구석 어딘가
작은 냄새들도 안녕
나 꼭 이겨서 지킬게

인간이 되는 방법은 한 가지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
...


오늘 시도한 '그냥 살뿐인 멋진 하루'가 꽤나 성공하고 있는 것 같아서 브런치를 켜고 이런 사소한 삶을 타닥타닥 쳐본다. 누구에게는 너무 쉬운 '혼자 카페'고 지루한 말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꽤나 의미 있는 시간이 되어주고 있으니 아무리 작은 '거리'라도 최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영화 <소울>의 메시지처럼 '목표가 아니라 일상이 삶의 이유'임을 느껴보기 위해서. 진심 어린 친구의 조언처럼 '일단 나부터 찾는 시간을 가지기'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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