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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Dec 15. 2022

[눈이 와] 내게 12월은 격동의 달이다

정지했던 감각을 켜고이 겨울도 다시 살아보자고

눈이 와


담뱃재처럼 머리칼에 엉기다

슈가파우더처럼 곤란하게 묻다가


줄 서서 들어간 떡국 집

사골국 한 수저 드는 순간에

휘둥그레진 눈알처럼 눈송이가 불어났어


세상에 우리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많은 빈틈이 있었을 줄이야


행인의 숨 사이사이를

빼곡히 채운 눈송이들이


내가 그동안

어떤 공간을 방치하고

얼마나 작게 살고 있었는지

생각은, 또 마음은 얼마큼 멈춰 있었는지 알게 해


매번 허탈하게 아스라지는 입김에

겨울은 재미없다-라고 생각하게 될 즈음

이렇게 눈이 와


죽은 가지처럼 정지했던 감각을 켜고

이 겨울도 다시 살아보자고

이렇게 눈이 와




통념상 도약의 시기는 3월에서 5월 정도다. 3월엔 학교가 문을 열고, 4월엔 연봉협상을 하고, 5월엔 전국의 예식장에서 부케를 던지고 또 던진다. 소생을 연상케 하는 봄. 연말부터 새싹이 트기 전까지 재충전의 시간을 갖다가 다시 볕처럼 그려지는 희망이 샘솟는 봄.


그에 비해 12월의 모습은 비루하다. 1~2월처럼 아싸리 스키장에 놀러 갈 만큼 추운 것도 아니고, 이제 막 빼입은 롱 패딩에 아직 적응이 안 되어 온몸이 찡기는 듯 불편하다. 대중교통 안 승객수는 그대로인데 의류산업 기술은 나날이 좋아져서 온갖 팽팽한 겉옷들로 버스와 지하철이 가득 찬다. 정거장마다 스슥스슥거리는 마찰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올해 마지막 달 중순이 되었는데도 사업 마무리가 안되어서 휴식의 꿈은 멀기만 하다. 유난히 캄캄한 퇴근길에 다들 후- 후- 한숨을 쉰다. 마스크 덕에 알았다. 겨울을 체감하고 언 손을 녹이려 입김을 부는 게 아니었다. 12월의 입김은 일 년의 고생이 담긴 푸념의 후- 후-였다는 것을.


평범한 직장인인 나도 12월에 접어들자 퇴사부터 시작해 온갖 생각들이 자라났는데, 어쩌다 보니 도약의 시기가 눈앞에 성큼 다가와있었다. 미루던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예식장만 예약해뒀던 결혼 준비에 박차를 가할 때가 온 거다. 거기에 덜컥 신혼집도 당첨되어서 당장 다음 주면 입주를 준비해야 한다. 주말마다 급하게 엑셀을 켜서 자금흐름을 계산하고, 예상 금액들을 입력한다. 일할 땐 몰랐는데 엑셀에 숫자 0이 하나 늘어갈 때마다 가슴이 철렁 인다. 365일간 쉴 틈 없이 미워했던 대표님의 돈타령이 더 이상 고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뿐이랴, 검진차 찾았던 산부인과에서 근종과 혹을 발견했다. 그것 말고도 염증과 생리불순까지 문제가 되어서 호르몬 주사를 한 대 맞고 왔다. 엉덩이가 하루 종일 욱신거려 길을 가면서도 한 손으로 막 문지르며 30대 언니들한테 전화를 한다. 원래 여자들 하나씩은 달고 다녀. 그리고 이노시톨도 꼭 챙겨 먹어봐. 부끄럼도 없이 퇴근길에 그런 통화를 한다. 결혼도 전에 아줌마 다 됐어, 아줌마 다 됐어... 그런 느낌이다.


사업 마무리가 안되었는데도 입찰 공고들이 쏟아져 나온다. 퇴사한다고 비장하게 말했다가, 비겁하게 도망가지 말고 상황을 타개해보자는 생각에 차라리 제안의 일선에 서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불만을 가지고 있는 팀장과는 같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대신에 내가 처음부터 다 해보겠다고 먼저 대표에게 제안했다. 첫 제안은 다행히 1차 심사에 통과했고 벌써 다음 주면 PT다. 한 해가 끝가지 딱 열흘 전에 첫 커리어 도약 시도의 심판을 받을 예정이다.


이런저런 탓에 익숙한 집에서 몸의 힘을 좀 빼고 쉬어야 할 이때 여러 가지 변화를 겪고 있다. 8년간 사귄 남자 친구가 번듯한 예랑이가 된다. 늘 복종해야 하는 줄로만 알았던 팀장을 어느새 견제하고 맞서 싸워나간다. 신축 아파트로 가기 위해서 묵었던 LH전세권을 제 손으로 반환했다. 모든 관계와 환경과 책임을 바꿔나간다. 이대로 눈 감았다 뜨면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오늘 점심에는 뜨끈한 떡국이 당긴다는 아픈 후임을 데리고 떡국국수집에 갔다. 강북삼성병원 앞에 있는 곳인데 매생이 굴국수와 낙지 김치 국수가 끝내준다. 예전 회사 다닐 때 응급실 실려온 적이 있었는데, 그날 퇴원하면서 여기 죽을 먹고 서대문에선 이 집만 와야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이쪽으로 회사를 옮길 줄은 몰랐지,라고 TMI를 남발했다.


식사를 하고 나오니 풍경이 아예 달라졌다. 회사 문을 나설 때 진눈깨비처럼 내리던 눈은,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풍성하게 자라 있었다. 혹인가? 폭설을 뚫고 걸어가다가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흰색 도화지 같은 눈밭을 만났다. 쫑쫑쫑 뒤따라오던 후임들을 뒤로하고 아이처럼 잠깐 뛰었다. 몇 년 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하소연하며 서성이던 퇴근길인 줄도 잠시 잊고서.


눈이 내린다. 눈이 오면 세상이 일순간에 바뀐다. 영 익숙해지지 않던 추위를 그제야 받아들인다. 온전한 겨울이구나. 그리고 그 겨울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준비가 있었는지 깨닫는다. 잎을 떨구고 영양을 뿌리 깊숙이 숨겨둔 자연부터 한참을 바빴다가 숨 한번 고르는 세탁소 아저씨, 만나는 사람마다 김장김치를 싸다주며 김치통은 꼭 반납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고모까지. 아무리 겨울이 휴식의 계절이라도 내게 12월은 격동의 달이다. 신년을 향해 부는 찬 바람에 설렘과 기쁨을 실어서 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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