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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한글; 반가운, 아이의 마음 표현

'당근브로야채죽'(아이가 지은 요리명)

by 세만월

퇴근길 할머니 폰으로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영상을 켜더니 아이가 진지하게 말한다.


"엄마, 놀랄 만한 소식이 있어. 놀라지 마."


"응, 안 놀랄게."


"나만 한글을 못 하는 거 같아.

다른 애들은 다 아는 거 같아.

모음자는 알겠는데,

자음 2개씩 쓰는 거는 모르겠어.

수업하는데 속상해서 화장지로 눈 닦았어."


"아이고, ○○가 많이 속상했구나.

엄마 내일 가니까 이해 안 됐던 거 같이 보자."


아이는 열심히 내게 얘기한다.

그 와중에 나는 잠깐 딴생각을 했다.

'야, 어떻게 모음자란 말을 쓰지.

기역 자도 모르던 아이였는데. 많이 늘었다, 정말.'

'와, ○○가 속상다는 마음을 표현하네.'


아이가 속상하다는 말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속상하다고 자기 마음을 내게 꺼내 보여준 게 좋았다.

한편으로는좌절이었을까도 싶었다.

공부 욕심이 있는 아이라 얼마나 속상했을까 싶었다.


초등학생 내담자들이 생각났다.

이런 상황이면 나는 내담자들에게 어떻게 했을까.

내 기준에는 아직 1학년이니 괜찮아인데

본인 딴에는 잘하고 싶었던 거니만큼

욕구를 응원해 줘야 할까.

모르는 부분을 같이 풀어보고

해결해보려고 하는 게 좋겠다.


"엄마랑 모르는 부분 같이 해보자.

그럼 알게 될 거야.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응."


"엄마가 언제 오지?"

"목요일, 토요일."


"엄마가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 일요일 있으니까

한글은 이제부터 엄마 있는 날은 무조건 할 거야.

월목토에 할 거야."


"그래, 그러자."


"어, 토요일은 못 하잖아."


"아빠한테 가는 주는 못 해도

엄마랑 있는 날에 하면 되지."


", 알았어."


아이 표정과 목소리를 보니 처음보다 풀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오후 담임선생님께 하이톡을 드렸다.

어제 아이가 한글을 자기만 모르는 것 같아

울었다며 속상하단 표현을 하길래

아이가 정말 한글을 더 익혀야 하는 건지

상의드리고 싶어 톡 드렸습니다.


곧 보이스톡이 왔다.

"아니에요.

엄마가 읽어준 책 내용 중 인상 깊은 걸 그려보라 했는데

엄마가 책 읽어주던 장면을 그렸길래

잘못 이해했다고 얘기해 줬거든요.

지난번에도 그랬거든요.

한글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 제가 한글 지도를 어느 정도 해줘야 하나 싶어

여쭤봤어요. 감사합니다. 오늘 알림장 확인하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우선은 마음이 놓였다.

한글이 모자란 건 아니구나.

그다음 든 생각은

아이가 무언가 못한다 싶어 속상했던 마음 알아줘야겠구나. 그러고 나서

못할 수도 있고 지적받을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아,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해결해 나가면 되는 거야, 하고 말해 주어야겠구나.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은

아이가 엄마가 책 읽어주던 게 대개 좋았었구나.


오늘 저녁은 아이랑

수프 끓여 먹고

알림장 보고,

오늘 밤엔 아이가 어떤 책을 고를까.

브로콜리, 당근, 버터, 밥 한 공기, 소금 한 줌만 넣고 끓인 '당근브로야채죽'
아이의 식사 전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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