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님을 경험했던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위로의 순간들이었다.
여섯 살,
(아버지의 주사, 회사에 간 엄마,
여섯 살 나는 외로웠다.)
동네 교회를 혼자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확실치 않을 만큼 어렸다.
대학교 3학년,
(내 심장에 구멍이 난 듯
바람이 그 안으로 스치고 들어가 시렸다.
신체적으로 시렸다.
경포대 앞 물결치는 파도를 보며 공허함으로 추웠다.)
기독교 동아리 친구 따라 워크숍에 갔다가
몇 날 며칠 울었던 기억이 있다.
대학원 시절,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공허함과 우울감으로
매 순간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하며
죽음을 시도하던 시기였다.)
캠퍼스에 성당이 있는데
토요일 오전 연구실을 올라가던 길에
장례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학교 설립 때부터 그때까지
학교에 많은 공헌을 하셨던
외국인 신부님의 장례미사였다.
나는 학부 출신이 아니었기에
그분의 수업을 들은 적도
얼굴을 뵌 적도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성당 안으로 이어지는
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미사라는 것을 드려본 적도 없는데
그냥 미사를 지켜봤다.
흐르는 눈물이 주체가 안 되었고
알 수 없는 감정에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는 주님을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한켠에서 너무 많이 울자
학생회에서 촬영 나왔다가
나와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들은 당연히 내가 그분의 수업을 들었거나
그분과 친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그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을 알고
당황스러워했다.
첫 직장 생활 중,
(우울증으로 사회생활 영위가 힘들어졌던 시기였다.)
늦은 밤 반지하 단칸방 책상 불빛 아래에서
주님께 눈물로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그 글은 시낭독회 활동을 하던 곳에서 낭독했고
낭독 중에 울먹였던 기억이 있다.
그 글을 어디에 두었는지, 아쉽다.
찾게 되면 브런치에 올리고 싶다.
(동네 교회, 서울의 대형 교회 등을 다니다가
어느샌가부터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흘러,
상담 공부를 하면서부터 알아차림을 고민하며
절을 다니기 시작했다.
절 주변을 산책하고 템플스테이도 하고 명상을 하고
내가 잊던 신의 존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절이 너무 좋다.
그리고 현재,
세례를 받고 미사를 드리고 있다.
대학원 시절 선배들이 너, 성당에 안 나가 볼래, 물어봤었다.
선배들 외에도 많은 이들이 내게 물었다.
우연일 수 있으나 우연이라 하기엔
내게 영향을 준 순간들이었다.
그 순간마다 내 민감성이 건드려지며
묘한 감정, 알 수 없는 짙은 연결감을 느꼈다.
무시할 수 없는 필연적 내 삶의 한 일부로 새겨졌다.
나는 영적인 사람이에요, 하고 너스레 떨며 얘기하곤 한다.
나의 민감성으로 그 연결감이 비롯된 것일 수 있으나
내 몸과 마음으로, 영으로 깊게 새겨진 그 경험의 순간은
내게는 조물주, 주님이다.
주님 말고는 내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