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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만월 Aug 16. 2022

6살 아이에게 배우는 사과

감정 알아차림<2022.8.16>(with 교육분석)

지난주 토요일,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미리 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KTX를 타고 부모님 댁에 갔다. 집에 도착하니 아이는 이미 일어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내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듣고 아이는 현관문에 이미 서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바로 앞에서 나를 보고 "엄마 왔어?" 하며 반갑게 웃어줬다. "왜 늦었어?"라고 하지 않아 '휴' 다행이다 싶은 마음과 아이의 밝은 미소를 보아 상쾌한 행복감이 동시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이미 아침식사를 차려 놓으셨고, 손을 씻고, 부모님과 아이, 그리고 나는 아침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본인이 며칠 전 약속이 있었고, 아이의 하원 시간에 맞춰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여 집 앞 하원 차량을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전화를 받지 않아 아이는 어린이집 차량에서 하원을 하지 못하고 다시 어린이집으로 돌아갔다는 해프닝을 말해 주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에게, "OO야, 혼자 어린이집 차에서 내리면 집으로 올 수 있지?"라고 말을 거셨다. 그 농담조로 하신 말에 얼마 전부터 내 맘에 걸리던 부분이 같이 떠올랐다.


"OO야, 파일럿이 되면 3개월 정도 엄마랑 떨어져 있어야 해. 그럴 수 있겠어? 사나이는 엄마 쫓아다니고 하는 거 아니야."

아버지가 아이에게 자주 하는 이야기였다.


교육분석 시간에 메인 주제는 아니었지만, 엄마와 아빠의 이혼으로 안 그래도 불안할 수 있는 아이에게 그런 농담은 조심할 필요는 있겠다는 이야기가 오고 간 적이 있었다. '그래, 나중에 시간이 마련되면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 그런 장난은 조심해 달라고 말씀을 드려야겠다' 하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혼자 집에 올 수 있지?" 하고 말하는 소리에, "아버지, 그러면 안 돼요" 하고는 소리를 높여 말씀을 드렸다. "위험해요. 절대 그러시면 안 돼요."

그러자 아버지는 "가만있어 봐라" 하셨다. 거기에 "'엄마랑 떨어져 있을 수 있지?' 하는 말도 하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하고 덧붙였다.

"그렇게 아이 키우는 거 아니다" 하시면서 아버지는 소리를 더 높이셨다.

"그러지 마세요."

"나 어렸을 때는 다 그렇게 컸다."

"그건 아버지 때 얘기고요. 그러지 마세요. 제 아이예요."

"그럼 데리고 가서 네가 키워라."

아버지와 나는 점점 소리가 높아져 갔고, 맘에도 없는 소리들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못됐다며, 어떻게 너 같은 애가 상담을 한다고 설치냐며 성을 내셨다.

아이는, 밥을 먹다 말고, 등을 돌리고는 울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엄마가 다투는 모습을 보고, 서로 소리 내며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놀랐다.

'앗뿔싸', 아이에게 미안했다.

동시에 '나는 왜 그런 거지?' 하는 후회가 들어왔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찾아왔다.


아버지와는 토요일 내내 말이 없었고, 일요일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전 내내 외출을 하시고 오후 3시쯤에야 들어오셨다. 나는 본체만체했다. 아이는 아버지가 오고 가실 때면, "할아버지, 다녀오세요", "할아버지, 다녀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


월요일, 아버지는 오전 일찍 외출을 하셨다. 비가 온다는데, 양복차림을 하시고는 서울에 볼일이 있다고 하시며 가볍게 죽을 뜨시고 나가셨다. 나는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할아버지, 다녀오세요" 배웅했다.



아이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집 앞에 옆집에서 기르는 새끼 고양이가 돌아다닌다. 아이는 새끼 고양이가 잘 먹는지, 잘 자는지를 수시로 확인한다.

"엄마, 고양이 배고프지 않을까? 먹을 걸 줄까? 저번에 할머니랑 멸치를 줬는데, 잘 먹었어."


안 그래도 어제도 아이의 말 따라 고양이에게 멸치를 많이 줬어서, "우리, 고양이가 멸치를 질려 할 수 있으니, 맛있는 참치를 줘 볼까?" 제안했다. "좋아, 엄마" 했다.


집 앞 바로 맞은편에 있는 마트에 가서 참치 캔을 사기로 했다. 바로 맞은편 마트를 가기 위해서는 무단횡단을 하지 않는 이상, 횡단보도 있는 곳으로 조금 내려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조금은 돌아가야 하는 거리였다. 집에서 마트까지 10분 내외였다.


뙤약볕이 하도 뜨거워 나는 양산을, 아이는 노란 우산을 양산 삼아 각자 쓰고, 슬리퍼를 신고 횡단보도 쪽으로 걸었다.

"OO야, 엄마가 할아버지한테 사과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버지, 잘못했습니다'라고 해."

"와, 맞다 맞아. OO 말이 맞아. 그런데 엄마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안 떨어지는지 모르겠어."

아이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마트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며칠 전 마트 옆 커피숍에서 아이에게 사 준 마카롱 이야기를 건넸다.

"OO야, 마트 갔다가, 마카롱 사줄까? 먹을래?"

"엄마 오는 날 사줘."

"아, 알겠어. 그럼 이번 주 아빠랑 잘 놀고, 일요일 오면, 엄마가 그날 마카롱 사 줄게. 엄마는, 그날 할아버지께 사과드리고 OO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 같이 마카롱 사 먹으러 가자."

"응."


돌아오는 금요일은 아이 아빠가 서울로 데리고 가는 날이다. 아이는 일요일 2~3시쯤 양평에 온다. 나는 아이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양평에 와 있는다. 아이는 그날 마카롱을 사달라고 하는 것이다.


마카롱을 엄마가 오는 날 사달라고 하는 대목도 무엇이라 정의 내릴 수 없지만 뭉클함이 순간 머물렀다.


참치캔을 사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는 참치를 담을 그릇을 할머니에게 물어보자고 했다.

"OO야, 할머니는 지금 엄마가 할아버지한테 사과를 하지 않아서 저기압이셔.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너도 알지?"

"응, 알아."

"그러니깐, 할머니한테 부탁하지 말고, 우리가 알아서 먹이를 주자."

"응, 그러자."


아이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재밌기도 했다. 부모님께 잘못한 엄마가 아이한테 상황 설명을 하는데, 그것을 다 알아듣는 6살 남자아이의 어른스러운 대답들이 말이다.


그렇게 아이에게 터놓고, 집에 도착해서 어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서울 가서 톡 드릴게요. 그리고 주말에 다시 와서 말씀드릴게요."

아이는 내 옆에서 나와 할머니와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대화가 끝나자, "엄마, 고양이한테 가 보자" 한다.


그렇게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한 시간 뒤에 콜택시를 불러 양평역으로 향했다. 아이와 할머니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택시가 떠나면서 보이는 아이의 등을 보는데, 마음이 아렸다. 미안한 마음과 함께.

아이에게 외로움과 고독이 들어와 자리 잡는 순간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서울에 도착해 몇 시간 뒤 교육분석 시간을 가졌다.


"우울감이 올라오지를 않아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만 살고 싶기도 해요. 마음은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해요. 인생의 희로애락을 이미 다 경험한 것 같아서, 여기서 더 큰 행복도, 여기서 더 큰 어려움도, 여기서 무엇을 더 이루려는 것도, 어떠한 기대감도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요. 이미 다 아는 마음인 것만 같은 것을요. 전부 지쳐요. 그만하고 싶어요."


"지금 무엇을 가장 하고 싶어?"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싶어요. 원 없이 산책하며 음악을 듣고 싶어요. 사람이 저를 위로해 주기란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OO는 누군가 나타난다면 결혼을 다시 하고 싶어?"

"아니요. 저는 결혼이 어울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아. OO이는 자기를 들여다볼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 같아. 그게 어떤 환경적인 요인에서뿐만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그런 거 같아."

"<The Hours>란 영화가 생각났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버지니아 울프인데, 그 작가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영화예요. 거기에 주인공 여자가 아이와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아이와 케이크를 만들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는지, 여자는 우울감에 몰입되는 장면이 나와요. 제가 그런 것 같아요. 챙겨주는 남편이 있어도 그 여자는 행복감이 채워지지 않아요.

그런데,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지금은 회사일에, 상담 공부에, 상담수련에 저를 볼 여유 시간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 당근 없이, 계속 달려오기만 했으니, 충분히 그런 맘이 생길 수 있어. 이해가 돼. 충분히 말이야."


아버지와의 다툼이 맘 한구석에 컸지만, 나의 우울감이 더 커서 교육분석 시간 초반에 꺼내놓지 않았다.

그러다 교육분석 말미에 꺼냈다.

"그런데, 주말에 아버지와 다퉜어요. 아이와 고양이 먹이를 사러 가는 길에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물었더니 아이가 '아버지,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래요. 한참을 같이 웃었어요. 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할머니가 엄마 때문에 저기압이니 고양이 먹이는 우리가 알아서 주자라고 하니, 아이가 안다고 해서도 또 웃었어요."


"그 짧았던 아이와의 순간은 너무 행복했어요."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거야. 몇 날 며칠 힘들다가도, 그런 순간이 있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거야."


"다음 주 치료센터에서 사례를 배분받기로 했는데, 문제 행동을 겪고 있는 6살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인데, 아이와 기질적으로 맞지 않아 힘들어하는 사례를 맡았어요."

"OO이는 그 사례를 통해서도 많이 배우게 될 거야. 그러면서 성장할 거야. 공감되는 부분도 많을 거야. 그래서 OO이는 상담을 해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저도 첫 사례를 받으면서(정식으로 사례 배분을 받게 된 첫 사례), 어떻게 이런 사례가 나에게 왔지? 하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아버지에게는 빨리 사과드리고. 안 그래도 버거운 것들이 많은 상황에, 쓸데없는 고민거리들을 더 붙이지 마. 그리고 사과할 것들은 미루지 말고 빨리빨리 하는 게 좋아."

"네. 교육분석 끝나고 바로 톡 드리려고요."


"아버지, 버르장머리 없이 행동을 하여 죄송합니다. 얼마나 아이를 예뻐하고 보살펴 주시는지 알면서도 행동이 못돼게 나갔습니다. <중략> 수양을 하고 있는데도 잘 안 될 때가 많아요. 오늘은 평안히 주무셨으면 좋겠어요. 아이가 할아버지께 어떻게 사과드려야 좋을까 했더니, '아버지, 죄송합니다'라고 했어요. 아버지, 죄송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아버지께 사과 톡을 보냈고, 주말에 다시 뵙고 말씀드리겠다고 톡을 드렸다.


서울행 KTX를 타기 위해 탄 택시 안에서 봤던, 슬리퍼를 신고 할머니와 집으로 걸어가던 아이의 뒷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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