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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만월 Feb 16. 2023

직면하기; 곰탕 vs 라면

감정 알아차림<2023.2.16>(with교육분석)


어제 지도교수님한테 논문 피드백받았어요.

3월 초 오전 11시까지 제출하는 원고로 본심 갈지 말지 결정하겠다고 하셨어요. 다른 동기들은 다 통과받았는데, 저만 본심 여부 정하는 거라고.


그리고

항상 미루다가 시간 쫓겨서 내고, 그런데 낸 것도 엉망이라고 하셨고요. 미루는 건 OO선생님 습관이에요. 고치지 않으면 논문 못 써요.


그런데

지도교수님 통화를 마치고 드는 생각이 예상 밖이었어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제가 지도교수님한테 그렇게 혼나면 낙담만 하고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진짜 미루는 습관 고치자' 하고요.

보통 미루다가 일을 어쨌든 끝내

'아이고, 어쨌든 했다, 휴', '그래도 다음엔 미루지 말아 보자'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확 다가왔어요. 정말 고치고 싶다! 하는 생각이.

정신이 확 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지도교수님한테 지난 학기 초반에 본의 아니게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냈었어요. 그런데 그다음주 면담 때 일절 개인적인 이야기는 선을 단호히 논문 이야기만 하셨어요. 그때 아차 싶었어요.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대하시는 교수님의 의도도 너무나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 수긍이 바로 됐어요. 내가 변명할 수 있는 거리들이 늘지 않도록 저를 위해서도 구분해 주시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교수님한테 지난 학기 수업시간에 혼이 났었을 때도 항상 정신이 번뜩 든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있더라고요.


그게 뭔 거 같아?


그걸 잘 모르겠어요. 보통의 저라면 속상해하고 기분이 가라앉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있기만 할 거 같은데 번뜩 정신을 리면서 '그래, 맞아, 고쳐보자, 하자!' 하고 생각더라고요. '이게 뭐지?' 싶은데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OO이가 지도교수님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는 거 같아.

(전부터 차오르던 눈물이 흘렀다)


아까부터 참고 있었는데, 눈물이 나오네요.

그 눈물에 참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아.


<중략>


참 쉽게 쉽게 가는 게 없다,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만든 건 본인이라는 걸 알지? 만들었다는 표현은 그렇지만.

네, 알아요.

왜 그렇게 만드는 걸까?

항상 그래왔던 것 같아요. 관계에서도 일에서도. 무언가 이제 됐다, 마음 놓인다 싶을 때쯤 가서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요. 관계에서 종종 그랬던 걸 알았지만, 이렇게 일에서도 그런다는 건, 이번에 저에게 중요한 '논문'으로 더 확실히 알게 된 것 같아요. 방학 동안 피드백받은 내용 수정만 찬찬히 했어도, 기한 늦지 않고 다른 동기들 낼 때 같이 냈기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상황은 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미루는 게 자기에게 주는 어떤 이득이 있을 거야.


순간의 희열? '와 해냈다'라는? 그런데 이번엔 실패했어요. 보통은 짧은 시간 안에 그래도 평균 이상으로는 해냈는데, 이번엔 못 어요. 정말 이러다가 큰일 나겠구나 싶었어요.


<중략>

 

(한참 교육분석을 받고 끝나갈 때쯤)


그런데 선생님. 지금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어요. 어제 지도교수님한테 혼이 날 때는 개운했거든요. 뼈아팠지만 그래도 정신 번뜩 들고, '그래, 하자!' 하고 그랬는데, 지금 선생님하고 얘기하면서는 뭐라고 해야 할까, 지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지루하다는 것보다는...... 싫은 것 같아요. 제가 보기가 싫은 것 같아요. 미루는 것에 대해 막 자세하게 얘기 나누니까 나누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고 그런 것 같아요.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이런 거 같아. 지금 이 시간에 본인이 미룬 것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여기서 나온 이야기들이 거울이 된 것 같아. 자기에게 싫은 부분을 보게 되니까 그게 불편한 것 같아.


맞아요. 불편. '불편'이 맞아요. 그런 거 같아요.


곰탕 끓이듯 계속 우리는 느낌이랄까요. 제가 보기 싫은 저의 모습을 곱씹게 되고 자세히 보게 되니까 불편한 것 같아요. 어제 교수님한테 혼 난 건 라면 같았거든요. 후루룩 끓일 수 있는 라면요. 그래서 개운했던 것 같아요....... 아, 왜 남편 이야기를 선생님한테 하지 않았을까 저번에 저희 같이 나눠 보기로 했었잖아요. 이거였던 것 같아요. 보기 싫은 거. 그래서 선생님한테 얘기 안 꺼냈던 것 같아요. 얘기 꺼내면 계속 봐야 하니깐. 직면하기 싫었던 것 같아요.


어제 지도교수님은 일로서 OO이가 바로 받아들인 거 같아. '맞아, 논문. 눈문 써야지' 하고. 그런데 남편은 관계의 문제잖아. 관계로 들어가면 OO이는 힘들어하니까. 그리고 일은 기한이 정해져 있어서 그때까지 끝내면 되는데 관계는 기한이 정해져 있진 않잖아. 미룰 수 있고 갖고 있을 수 있고.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어제 지도교수님 하고 통화를 끝내고 참 희한한 감정이다 싶었거든요.

그 개운함이 이해가 요. 그리고 왜 남편 문제는 하지 않았는지도요.


이제 정리가 됐어요.

정리가 되었다니 다행이야.


남은 시간 집중해서 논문 정리할게요. 최선을 다하고 제출하면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수 있을 같아요.

그래, 그럼 잘 준비하고 다음 시간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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