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길이 닿은 곳에 여전히 남아있을지 모를 내 흔적을 상상해 본다. 식지 않은 내 온기가 공기 중에 떠 다니진 않을지, 보랏빛 설렘과 흥분이 어느 골목 사이에 서려있진 않을지. 생생한 과거는 때론 지금 이 순간보다 더 현실적이다. ‘여행’이 비타민 복용이라면, ‘여행의 추억’은 119다. 의미인즉슨, 효과를 당장은 알 수 없지만 기대와 믿음으로 비타민을 챙겨 먹는 것은 마치 여행 같다는 것. 삶의 무게감이 여실히 느껴져 지칠 때나 일상이 유독 지루할 때 여행의 추억은 119급 속도와 효과로 도파민이 치솟아 일상과 상상의 경계가 잠시나마 사라진다는 것. 데이터베이스에 성실히 쌓여가는 크고 작은 추억의 조각들 덕에 순식간에 충만한 감정에 빠져들 수 있는 일상은 대체로 살만 하다. 차지하는 시간의 밀도와 비중으로 따지자면 여행이 삶에 기대야 하는거 아닌가 싶은데, 거대한 몸집의 삶이 발 한쪽 만한 여행에 기대는 격이다. 그런데, 나쁘지 않다.
나를 위한 여행을 디자인하며 살아온 날들은 고밀도 고농도의 삶이었다. ‘남들과 다르게’에 방점을 찍은 게 아니라, ‘나만의 여행’과 ‘나답게 하는 여행’에 주목하고 몰입했다. 만약 한 뼘 정도 남들과 다른 게 있었다면 ‘나’에게 집중한 여행의 결과였을 뿐이다. 칼날을 거듭 갈수록 반짝 거리며 날카로워지듯, 오랜 세월 벼려진 취향과 질문 덕에 나만의 여행 지도가 그려졌다. 나 자신이 싫어진 즈음에 떠났다가 사랑을 회복해서 돌아오기도 했다. 여행이란 참으로 위로와 결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구나 실감했지. 그 뿐이랴, 여행 속 리추얼도 탄생했다. 한 도시의 매력을 더 촘촘히 느끼기 위해, 사랑해 마지않는 호텔을 더 많이 탐닉하기 위해 호텔 이사하기를 늘 감행했다. 도시를 가장 입체적으로 여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좋은 동네를 감지하는 감각이 키워진 덕에 여행과 책과 서점의 3중주를 만끽했다. 좋은 동네엔 항상 오래된 서점 혹은 오랜 세월 지켜진 서점이 있었다. 보물을 발견하는 건 물론이요 같은 것을 애호하는 사람들과의 교감은 더불어 주어진 보너스였다. 작가가 서점 주인인 덕에 태평양을 건너 서점에서 저자 친필 사인을 받아본 추억은 할머니가 돼도 거듭 자랑할 거리다. 여행 속 작은 서점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다정했고 무척 따스했다. 여행이 낭만을 부르는 걸까, 낭만이 여행을 불러오는 걸까. 불현듯 찾아와 단숨에 사라질지라도 여행 속엔 분명 감미로운 낭만이 존재했다. 기억 속에 포개어 둔 낭만은 한겨울의 주머니 속 핫팩과 다름없지.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에서 책의 정기를 가득 받으며 끄적인 러브레터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가장 흠모하는 도시 속 아파트에서 나무바닥의 삐그덕거림의 피처링에 추었던 맨발의 블루스는 또 어떻고. 배경 음악이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이었다는 건 다시 돌아봐도 한도 초과의 낭만일세.
혈관을 타고 흐르던 커피와 술은 그야말로 도시의 맛이었다. 로컬 레스토랑 ‘마르코디(Marcodi)’에서의 디너 코스 이름이 바로 ‘미식의 여정(Gourmet Journey)’이었단 건 우연이 아니었다. 메뉴판은 없지만 다정한 스토리텔링이 제공되는 그 여정에 함께했던 건 미지의 세계가 열린 사건인 셈이었다. 도시를 그리고 여행을 ‘맛’으로 추억할 수 있다는 건 특별한 기쁨이다. 혈관과 위장과 간을 내어준 용기와 치기 덕분에 쌓아 올린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열과 성을 다한 고민과 도전의 환희라고나 할까. 여전히 세상의 많은 도시가 그들만의 맛으로 나를 유혹, 아니 기다리고 있다. 필히 부지런해져야만 한다. 여행을 향한 설렘은 과연 언제 폭발할까? 내게는 여행을 준비하는 3개월 전 즈음 클라이맥스가 찾아온다. 여행을 준비하는 날들은 또 하나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기대와 설렘을 독점하는 시기이자 설렘의 순도가 가장 높은 시기랄까.
설렘이 작동하는 순간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인 여행 디자인이 시작된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나만의 시간’이 밀도 높게 펼쳐지는 것이다. 출발은 언제나 ‘나’에게서부터다. 맹렬한 자문자답으로 오로지 내 마음과 생각에만 집중한 채 질문하는 시간이니까. 뜻밖의 발견과 놀라움이 마치 입력값과 출력값처럼 어김없이 주어진다. 여행 전 몇 개월 동안에만 맛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그 절대적 시간 속 절대적 매력은 결코 놓칠 수 없다. 퍼즐 맞추기의 시간이랄까. 첫 조각인 ‘호텔’에서부터 두 번째 조각인 ‘책’을 지나 마지막 조각인 ‘언어’에 이르는, 이 짜릿하고도 즐거운 게임을 끝없이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나만을 위한 호텔을 찾고, 책 속에 숨겨진 도시의 역사와 이야기를 음미한 후 몇 마디라도 뱉어낼 수 있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언어를 배우는 일은 기대 이상의 여행을 만들어준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여행 준비 패키지다.
도시를 음악으로 만날 때 감각은 섬세해지고 감동은 깊어진다. 온몸과 마음의 모든 세포를 깨우고 에너지를 그러모아 몰입하고 즐기다 보면 내가 있는 이곳이 지구인지 우주인지 잠시 잊게 된다.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과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네덜란드의 콘체르트허바우는 내게 음악으로 둘러싸인 우주이자 음악의 파도가 치는 대양이었다. 공간 속에서 유영하고 떠다니던 내 영혼이 뜨거워졌던 그 순간들의 합이 다름 아닌 ‘여행‘인 것이다. 음악으로 뜨겁게 달궈진 여행은 시간 여행으로 마법의 순간을 마주하기도 한다. 버스 타고, 트램 타고 20분만 가면 ‘성(castle)’에 다다른다는 것이 시간 여행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21세기에서 순식간에 18세기로 시간 여행을 하는 즐거움을 과연 무엇이 이길 수 있을까. 궁정 회의와 무도회를 상상하고, 왕과 왕비의 정원 산책을 그려보는 재미까지 더하면 어른을 위한 동화책이 따로 필요 없잖은가 말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나만의 ‘낙원’을 만나기도 한다. 그 순간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지만 강렬한 확신을 남긴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드디어 왔구나’라는 한마디 탄성과 함께. 삶을 바쳐 사랑하고 싶은 도시 ‘빈‘에서 그 낙원을 만났다. 숫자에 약한 내가 ‘수퍼센스와 나’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날짜(2018.8.29)까지 외우고 있는 걸 보면 그 ‘아날로그의 집’은 특별함 너머의 무언가를 지닌 곳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한 문장 ‘Trust Your Senses’는 영원의 느낌으로 뇌리에 각인됐다. 그리고 확신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잊히지 않겠구나, 혼돈 속에 놓일 때마다 떠올리겠구나’라는 것을. 공간은 나를 다시금 그곳으로 불러들였고 틈만 나면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양새와 가장 닮아있는 도시와 공간을 만난 건 삶에 몇 번 없을 행운이다. 그리고 여행만이 건네줄 수 있는 선물임에 틀림없다. 여행에 나를 맡기고 감각을 일제히 열어젖히니 이루어진 만남이었으리라. 삶에 찾아온 흔들림이 이토록 반갑고 감동적일 줄이야.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이제는 어감에도 어색함이 없다. 90대 어른들의 활기와 지혜가 점점 더 많이 노출되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의 여행은 ‘노년의 삶에 대한 로망’을 수집하는 여행의 색을 띠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하루하루 나이 들고 있고 머나먼 곳이라 생각하는 노년기는 아마도 금세 찾아올 테니 말이다. 여행에서 만난 충만한 노년은 찰나의 모습에 불과할지라도 큰 울림과 감동을 건네주었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은 ‘일상을 잘 살아가는 삶의 예술가들’ 그 자체였다. 음악과 미식을, 햇살과 걸음걸음을, 예술과 자연을 그리고 이른 아침의 커피와 신문을 있는 힘껏 만끽하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애써 내 모습을 찾고 또 찾았다. 내가 맞이할 ‘내일’이기를, 내게 주어질 ‘일상의 한 순간‘이기를 소망하면서. 구체적인 힌트를 수집하다 보니 깨달음이 찾아오기도 하더라. 인생은 늙어가는 것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 젊은 세대에게 사랑과 지혜를 나눠주기 위해 여행을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것.
여행이 대체 ’왜 좋은가’에 대해 밤새 논할 수 있다. 유일한 정답이 없는 이 아름다운 토론과 나눔과 흥분과 열정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할 수 있을까. ‘여행이야기만 몇 날 며칠 하는 여행’을 하는 꿈을 꾼다. 여행 속엔 ‘변화’와 ‘성장’과 ‘발견’이 있었다. 주로 혼자 혹은 연인과 단 둘이 하는 여행의 포맷에서 벗어나본 적 없었다. 그런데 친구 부부의 환대와 가이드에 의지하는 여행을 해본 건 새로운 도전이자 시야의 확장이었다. 여행에서 ‘나’를 버려본다는 것, 그것은 신선했고 꽤 해볼 만한 일이었다. ‘발견’은 나 자신을 향함은 물론이요, 함께 여행을 하는 연인을 향한 것이었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을 실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는 깨달음과 어떤 순간에 행복해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우리는 살면서 ‘알지만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나는 더 알고 싶다, 세상도 사랑도.
사랑은 ‘끊임없이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걸 여행의 여정에서 배웠다. 베를린에 찾아온 10월의 태풍은 언뜻 커플의 위기인 듯했지만 서로에게 최고의 모습과 최악의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행운이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옛말처럼 여행에서 배운 걸 잊지 않고 간직하는 서로의 모습을 볼 때 여행의 순기능을 실감한다고나 할까. 커플 여행의 서사는 계속되고 있다. 여행이 건네준 선물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역시 ‘느림의 미학’을 우선으로 꼽고 싶다. 느리게, 충만하게, 빛나게 흘러간 하루는 반년 치의 몫을 충전한 것과 다름없었다. 여행 속에도 ‘휴가’를 내어 여유 속 더 깊은 여유를 누려본 건 가장 잘한 일이었다. 여유보다 매력적인 건 없다. 분주한 발걸음과 기민한 감각을 잠시 잠재우고 돈보다 귀한 시간을 기꺼이 할애해 나 자신에게 선물했던 여행 속 휴가의 경험은 잊지 못할 추억이자 자랑 거리다.
‘나만의 도시’ 혹은 ‘우리만의 도시’로 부르는 곳이 있다는 건 즐겁고 근사한 일이다. 첫눈에 반해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가 된 오스트리아 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독보적인 분위기를 지녔지만 결코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빈의 우아함과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묘한 분위기가 늘 그립다. 어여쁜 붉은 벽돌의 도시 스톡홀름의 다정함과 단아함도 종종 그립다. 만약 도시가 사람이라면 스톡홀름은 말수가 적고 여유를 풍기는, 자유와 절제의 향기가 나는 젠틀맨 아닐는지. 세련미 가득한 매력으로 ‘도시의 매력’을 물씬 풍기던 코펜하겐을 떠올릴 때마다 지구상에 이런 도시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담백하고 시크한 위풍으로 ‘나다움’을 추구하는 멋진 도시. 다름과 독특함을 환영하는 특유의 분위기와 에너지가 여전히 느껴지는 것만 같다.
삶에도 때마다 혼돈이 찾아오듯 여행에서도 혼돈을 만난다. 다만 그 혼돈이 싫지 않을 뿐. 지독히도 멋진 디자인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즐거운 미식 그리고 세계 최고의 라테와 온갖 불확실함으로 가득 찬 도시, 암스테르담. 삶에 찾아드는 혼란과 혼돈을 마주할 때마다 혼돈의 도시를 추억한다. 묘하게 치유 효과가 있다. 여행이 입체적일 수 있었던 건 호텔을 향한 강렬한 탐닉이었다. 호텔은 도시의 축소판이자 도시의 생생함을 담고 있는 최고의 공간이다. 판타지와 럭셔리 사이를 넘나들기도 하고, 자연과 예술이 공존하는 곳에서 미감을 충전했다. 비밀스러운 저택의 정원에서 인생 최고의 혼자만의 밤을 보냈고, 오래된 아름다움이 깃든 곳에서 감탄을 실컷 뱉어내기도 했다.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를 드디어 만난 기쁨에 신나게 공간 구석구석을 누볐고, 호텔과 나 사이 어여쁜 사귐의 교감도 경험했다.
모든 게 모험이고 탐험이었다. 내 삶에도 꼭 있길 바랐던 ‘아름다운 시절’은 여행 속에 있었다. 물론 현재 진행형이다. 내밀하게 나를 관찰하고 연구해 여행의 모든 여정에 촘촘히 녹여냈던 나 자신에게 이따금씩 칭찬을 건넨다. 흠모하는 도시, 호기심이 발동하는 도시로 떠나 음악, 미식, 책, 예술, 자연, 건축 그리고 사람으로 도시를 만났다. 그 옛날 르네상스 시절 탄생된 ‘더 멀리 갈수록 더 많이 보고 알게 된다’는 모토가 어느새 내 삶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 생각과 취향을 벼린 길 위의 여행, 오래된 것을 향한 경이감 속에서 키운 감성과 감각, 다름은 아름다운 것이며 느림은 미학 그 자체라는 것을 배운 여행이었다. ‘나만의 것’이 스토리로 켜켜이 쌓였다. 여전히 여행은 ‘여행 자체가 즐거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늘 새롭게 설레고 기대한다. 나는 성장하고 있고, 고로 나는 여행한다. 그렇다, 나는 21세기형 그랜드 투어리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