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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May 24. 2018

[브런치 무비패스] The Cakemaker

상처와 상처가 만나면 사랑일까.

*주의: 스포가 있습니다.*


상처와 상처가 만나면 사랑일까.


사랑이 이루어진다, 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사랑이 끝나버렸다, 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지.


독일어와 이스라엘어가 뒤섞여 사운드트랙처럼 들려오는 영화 케이크메이커. 무심하게 툭 내뱉어진 듯해도 생경한 두 언어가 음악의 멜로디마냥 큰 역할을 도맡아서 그런지 영화는 더 이국적이었다랄까. 그런데 그 멜로디의 무게, 그러니까 이야기의 밀도와 농도가 제법 버거운나머지 길고 길었던 여운을 어찌할 길 없었던 어느 봄날의 밤이었다.


파티셰이자 카페 오너로 베를린에서 잔잔히 그리고 성실히 살아가는 묵직한 남자 토마스.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업무차 베를린을 오가며 토마스가 운영하는 카페 크레덴츠로 자주 발걸음 하던 오렌. 그는 늘 케익과 더블 에스프레소를 먹고, 베를린에서 가장 맛잇는 케익이라며 수줍은 칭찬을 건네고, 아내 선물로 쿠키 박스를 사가곤 했다. 오렌이 블랙 포레스트 케익을 먹는 장면을 지켜보며 치밀어오르는 단 몇 초간의 질투어린 침고임은 영화로의 몰입에 단연 으뜸이었다(고 수줍게 고백해본다).


어느날 마치 그들만의 암호나 신호로 소통하는 듯했던 짧은 대화 이후로 오렌과 토마스는 연인이 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이었던 터라 전체를 조망하던 내 마인드 세팅과 시각을 빠르게 각 인물의 특성과 관점에 집중하는 것으로 수정해야했다. 이스라엘에 아내와 아들이 있는 어엿한 한 가정을 이룬 남편이자 아빠이지만 오렌에겐 동성을 향한 사랑과 연애가 떨쳐낼 수 없는 그의 정체성이자 비밀이었나보다. 어쩌면 본능이었을까.


토마스와 오렌의 사랑은 특별할 것 없이 잠잠히 흘러가는 듯 그려졌다. 그런데 그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장면 장면에서 비쳐지는 (마치 소설 속 행간의 찜찜한 뉘앙스와 같은) 한 줄기의 불안이 계속해서 내 생각과 감정에 투사되었다가 오렌의 아내 아나트에게 다시 투사되는 것만 같았다. 우리네 삶에서 오늘이 진정 내 사랑하는 연인과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내일 일은 알 수 없는 게 정말이지 인생 아닌가. 오렌은 (관객에게는 무척 허무하고도 조용하게) 사라진다(죽는다, 란 표현보다 영화의 흐름상 사라진단 표현이 왠지 더 어울려보인다). 아나트에게 베를린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이스라엘을 떠나겠다고 선포하며 집을 나섰던 그 길로 교통사고로 죽게된다. 연인에게, 그리고 아내와 아들에게, 이보다 더 한 비극이 있을까. 영화의 스토리 농도가 짙어지는 지점이었다.


도통 연락이 되지 않던 오렌의 독일 회사로 찾아가 그의 죽음을 알게 된 토마스. 그는 왜 그 순간 바로 슬퍼할 수 없어던 걸까. 토마스는 극도의 절제를 보였다. 믿을 수 없어 슬픔은 잠시 뒤로 미루었던 건지, 슬픔에 눈물을 흘리는 순간 사랑은 끝이 난다는 게 두려웠던 건지 그는 홀로 있는 순간에조차 애도하지 않는다. 주저앉는 대신 무작정 오렌의 나라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오렌의 아내 아나트가 운영하는 카페에 무작정 들어서 더블 에스프레소와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조심스레 그녀를 살피고, 그곳의 공기를 삼킨다. 눈물도 미룬채 예루살렘으로 향한 토마스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에겐 어쩌면 그 방법이 온전한 애도로 향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나트에게 그가 나타난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피어 오르는 불안과 분노와 슬픔의 오케스트라 향연이 커져갈 때즈음, 토마스는 아나트의 카페에서 일자리를 구해 설거지를 하고 주방을 치우고 케익과 파이와 쿠키를 굽기 시작했다. 그는 의도하진 않았겠지만(아니 어쩌면 바랬을까) 그의 존재와 베이킹이 서서히 아나트와 그녀의 상처난 영혼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선 거리껴하는 독일인인 토마스를 예루살렘 코셔 인증 카페인 자신의 일터에 선뜻 직원으로 받아들인 아나트. 토마스의 케익과 쿠키와 파이를 서스름없이 카페에서 판매하는 그녀. 그러고 보면 아나트 그녀야말로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자유한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어찌 애도해야 할지 모르는 토마스에 비해선 되려 열린 마음으로 토마스로 인해, 토마스의 진심이 담긴 도움과 케익으로인해 위로를 받으며 슬픔과 분노와 절망의 과정을 걸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토마스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따뜻하게 다가오는, 내면으로 외면으로 기대어 오는 아나트를 그저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도 아나트를 통해 애도했던걸까...그녀에게 사죄하는 마음이었던 걸까. 오렌을 사랑했던 토마스가 아나트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어찌 설명될 수 있을까. 그저 그의 선택을 존중해보는 관객일 수밖에...


오렌이 베를린에서 만나고 있던 대상이 토마스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그려지고 보여진 아나트의 모든 것(심리와 표정과 모든 몸짓과 신음과 눈물) 그리고 오렌의 죽음만치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쫓겨나게 된 토마스가 그제서야 흘리게 된 첫 눈물이 내게는 이 영화의 화룡점정이었다. 아나트가 토마스를 더이상 보지 않겠단 결정을 내린 그 순간은 슬픔으로만 채워진 게 아닌 원망도 분노도 두려움도 남지 않게 된 텅 빈 순간이 아니었을까. 결국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각자의 방식대로 오렌의 죽음을 애도하고, 남아있는 그들의 삶을 향해 한 움큼의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건 아니었을까.


영화 속 곳곳에 여백이 존재한다. 그 여백의 공간에서 관객으로서 마음껏 생각하고 고민하고 상상하고 감정이입을 해볼 수 있었다. 쏟아진 토마스의 눈물에서, 갈망과 두려움으로 점철됐던 오렌의 눈빛에서, 가녀리게도 처절했던 아나트의 몸짓에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곳'이란 게 정말 있는 거라면, 사랑이 찾아와 머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여느 때의 삶을 다시 이어가는 토마스와 아나트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베를린 토마스의 카페 크레덴츠의 먼발치까지 찾아 왔지만 토마스를 그저 바라보며 미세한 미소를 지은 아나트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찾아온 사랑은 그 어딘 가에서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고 나에게 그리고 연인에게로 자라나겠지. 그 자리를 누군가 떠나게 된다면 그곳엔 사랑의 뿌리가 남는가, 상처만 남는가. 영화 케이크메이커의 오픈 결말은 또 다른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 이야기를 채워 나가게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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