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 존재하는 법
영화 <그랜마>의 주연은 일생동안 페미니스트, 레즈비언 그리고 다양한 인권운동에 기여한 미국의 대표 희극인 릴리톰린이다. 작품은 철저한 여성주의 영화로서 분명한 주제의식을 나타낸다. 이 로드무비는, 2015년 미국비평가협회 독립영화 톱10을 수상하고, 골든글로브 코미디 부문에서 여우주연상 후보를 기록하며 작품성 또한 인정받았다.
-낙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레즈비언인 엘은 애인과 헤어진 아침, 덜컥 찾아온 손녀 세이지를 맞이한다. 세이지는 엘에게 630달러가 있냐고 묻는다. 낙태 시술을 위해 예약 시간 전까지 돈을 마련해야 했던 그는 남자친구의 침묵과 배신으로 급하게 엘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돈에 시달리기 싫어 충동적으로 신용카드를 모두 끊고 은행 빚을 갚아버린 엘의 수중에는 43달러 밖에 없다. 무척이나 엄한 엄마에게는 이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세이지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엘은 함께 630달러를 마련하기 위해 떠난다. 사별한 전부인의 차를 몰고 엘은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이 지나왔던 족적을 되짚고, 영향을 주고받은 지인들을 다시 재회한다. 영화 “그랜마”는 이 과정을 통해 여성이 어떻게 세상에 존재해왔는지, 그리고 어떤 문제와 혐오를 마주해야 했는지 보여준다.
낙태시술소였던 자리에 들어선 카페에서, 엘은 ‘낙태’에 대해 분명히 발음했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공손한 표정을 가장한 채 나가달라고 묻는 사장에게 엘은 소리친다. “지금 당신이 선 곳에서 수많은 의도치 않은 임신이 끝났어.” 그리고 연신 죄송하다는 세이지에게 대체 뭐가 죄송하냐고 다그친다.
여성이 자신의 신체에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방해하고, 남성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 사회에 엘은 계속해서 따져 묻는다. ‘왜 우리는 “낙태”라는 말을 떳떳하게 지칭할 수 없는가?’, ‘당연한 권리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강압하는가?’. 많은 물음들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엘은 답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노는 책임을 회피한 남성을 만났을 때에도 표출된다. 한 푼의 돈도 줄 수 없다는 뻔뻔한 세이지의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하자, 엘은 지지 않고 골프채를 휘두른다. 자신에게 대항하는 여성 앞에 쓰러진 나약한 남성은, 양말 속에 숨겨둔 50달러가 있다고 실토한다. 엘은 학교에 소문이 날까봐 불안해하는 세이지를 안심시킨다. “걔가 세이지 할머니에게 맞았다고 할까?”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엘은 그것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성 위주의 세계에서 여성의 존재가 얼마나 나약하게 평가 절하되었으며 부정당했는지, 엘은 직시하고 있는 있다.
- “엘”로서의 삶
주인공 엘은 레즈비언이다. 영화는 소수자 엘의 삶에도 주목한다. 엘은 사별한 전부인을 잊지 못하고 새로운 애인과의 마찰을 거듭하다 헤어진다. 차갑게 애인으로부터 돌아선 뒤 화장실에 홀로 서서 울음을 터뜨리는 엘은, 많은 이들에게 부정당하고 이에 대항하며 살아왔다. 엘의 딸 주디와 손녀 세이지는 그런 엘을 두고 분노 조절을 하지 못한다고 힐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엘은 분명히 말한다. “그저 왕재수를 보면 참지 못할 뿐이라고.” 엘은 혐오와 불의에 참지 않고 분노한다. 타인이 보기에 과격하고 불친절할지라도 그는 형식적이고 고리타분한 현실의 벽 속에 어떤 불평등이 있었는지를 끄집어내는 사람이다.
엘은 돈이 구해지지 않자 딸에게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전남편을 찾아간다. 그가 커밍아웃 하기 전 만났던 남편은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키스를 요구한다.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말하는 전남편의 행위는 상당히 모욕적이고 폭력적이다. 이 과정에서 엘의 낙태 경험이 밝혀진다. 그는 낙태가 죄로 치부되던 시절 불안전한 상태에서 시술을 강행해야만 했다. 끔찍한 고통을 복기하는 엘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그러나 엘은 자신을 원망하는 전남편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정체성을 확립하고 살아갔던 엘은 스스로를 부정해야만 했던 과거를 자책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 널 괴롭히면 날 상대해야 할거야.”
결국 엘은 세이지의 손을 잡고 딸 주디를 찾아간다. 엘처럼 레즈비언으로 살아왔던 주디는 인출기에서 돈을 뽑아 딸에게 쥐어주며 실망했다고 말한다. 엘은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고, 엘은 답한다. 임신은 절대 여성의 책임만이 아닌데도, 사회는 남성이 제 몫의 책임을 지지 않았을 때 그 부담을 온전히 여성이 감내하게끔 몰아세운다. 인간은 실수할 수 있다. 엘은 냉혹한 잣대가 자꾸만 여성에게만 향하는 사회를 똑바로 바라본다.
자신의 냉정함과 고집을 비난하는 주디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그는 세이지와 다시 차에 오른다. 중간에 차가 펑크 나지만 소중히 여기던 전 부인의 차를 갓길에 세우고 히치하이킹을 시도한다.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냐고 물으며 두려워하는 손녀의 곁에서 단단히 머물면서 길을 인도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낙태 시술소에서 엘은 다시 한 번 상담을 받아보라는 의사의 말에 세이지의 손을 붙잡는다. 혼자 들어가겠다는 세이지에게 그는 말한다. “누구든 널 괴롭히면 날 상대해야 할거야.” 세이지는 안으로 들어가고, 엘은 시술소 앞에서 낙태를 반대 시위를 하고 있던 아이에게 얻어맞은 눈을 치료한다. 손녀가 곁에 없을 때야 그는 의사에게 “많이 아플까요?”라고 묻는다. 자신이 받았던 시술 과정을 이야기하며 그 시간이 무척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한다.
시술이 끝나갈 무렵,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달려온 주디가 병원에 도착한다.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엘과 주디는 나란히 자리에 앉는다.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어색함이 감돌지만, 둘은 같은 여성으로서 그리고 레즈비언으로서 공존했던 시간을 통해 연대한다. 그들의 연대는 앞으로 남은 시간을 더 살아가야 할 후 세대 여성 세이지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이지 또한 그 연대에 함께하고, 이어나가며 다른 여성들과 연대할 것이다.
-자신을 인정하고, 홀로 남은 길을 걷는 여성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1953년 처음으로 낙태죄가 한국에서 제정된 지 66년만이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낙태죄 폐지를 권고한 지 약 일 년 만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암암리에 안전하지 못한 불법 시술과 약물들이 거래되어 왔다. 낙태를 하다 생명을 잃는 이도 있었고,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이도 있다. 낙태죄는 여성이 스스로 신체에 행사할 권리를 빼앗는 것만으로 사회가 자행한 폭력이자, 인권 침해다. 위헌 판결이 났다는 것에 작은 안도를 느끼면서도, 다른 국가에 비해 많이 늦었다는 것이 안타깝다. 자신의 지난 세월을 작고하는 엘의 쓴 얼굴에서 우리나라의 현실이 투영됐다.
영화 “그랜마”는 로드무비이다. 1시간 20분이라는 러닝타임동안 엘의 하루를 담는다. 엘은 비상식적인 가부장제로 점철된 구 사회를 몸소 지나쳐 온 여성이자 성소수자다. 또한, 그 이전에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자 욕망해온 중년의 인간이다. 암묵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조성된 거짓된 평화는, 어떤 혐오도 개선 할 수 없다. 엘은 그것을 안다. 그는 약자와 소수자를 종용하는 사회의 영악함을 세월을 통해 꿰뚫고, 바로잡으며 후세대 여성과 연대한다. 엘은 택시가 자신을 두고 떠나버려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남은 길을 걷는다. 그 길이 어둡고 남은 이는 자신뿐이지만 엘은 계속 걷는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남은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다.
글.기획/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