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은 사라진다. 내 무책임한 말만 빼고 말이다"링컨
O에게
오늘은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밥을 먹었어.
특별한 날은 아니었는데,
다들 시간이 맞아서 가까운 식당에 모였지.
메뉴는 늘 그렇듯 삼겹살이었고, 고기가 익어갈수록 대화는 자연스럽게 같은 주제로 흘러갔어.
“요즘은 누구 만나냐.”
“결혼 생각은 있냐.”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건, 예전부터 늘 서툴렀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 이야기는
가볍게 던지고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메뉴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항상 어느 정도 각잡고 대답해야 하는 문제 같거든.
오늘도 마찬가지였어.
내가 잠깐 물잔을 들이키는 사이, 가족 중 한 명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어.
“너 요즘은 진짜 어때? 아무도 없어?”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제일 먼저 네 얼굴이 떠올랐어.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는, 그 얼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졌지.
네 이름도, 네 도시도, 우리가 지금 어떤 모양의 시간을 버티고 있는지도,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말과 말할 수 없는 말 사이를 따져보느라 생각이 복잡해졌어.
결국 나는 늘 하던 대답을 했어.
“응, 뭐… 써야 할 글이 많아서. 아직은 일부터 좀 해야지.”
그 말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어.
실제로도 마감이 많고, 대본도 정리해야 하고,
이 관계를 포함해서 내 삶의 많은 것들을 글로 버티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말만으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와 나 사이에 오가는 마음의 모양을
전부 담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입 안에서 조금 쓸쓸한 맛이 났어.
사람들은 사랑을 물을 때,
대부분 간단한 요약을 원하잖아.
“있다 / 없다.”
“사귀는 중이다 / 끝났다.”
“오래됐다 / 얼마 안 됐다.”
이런 식의 문장들이면 충분한 것처럼.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두세 문장으로 마무리되기엔 조금 복잡한 쪽에 속하는 것 같아.
너는 먼 도시에서 연구와 수업을 버티고 있고,
나는 서울에서 대본과 현실을 오가며 살고 있고,
14시간의 시차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의 하루를 조금씩 놓치고,
조금씩 채워 넣으면서 사랑을 이어가고 있으니까.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연애라고 부르자니, 같이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엔, 우리가 함께 견뎌낸 밤들이 너무 많아.
집에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사랑을 설명해 달라는 말은,
결국 그 사랑을 증명해 보라는 말과 비슷하다는 걸.
“이만큼 만났고, 이만큼 함께했고, 이만큼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증빙 서류를 내밀어야만
비로소 이해받을 수 있는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
근데 있지,
나는 네가 그런 시험대 위에 올라가길 바라지 않아.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좋은 관계가 되기 위해
애써 모양을 맞추는 사랑 말고,
당장 설명이 잘 되지 않더라도
우리 둘에게만큼은 분명한 사랑이면 좋겠어.
예전에 내가 이런 말을 쓴 적이 있지.
나에게 매번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좋은 연애를 하기 위해
너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오늘 가족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괜히 너에게도 미안해졌어.
네 이야기를 제대로 꺼내지 못한 것 같아서.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랑의 무게를 이 테이블 위 가벼운 농담거리로 올리지 않은 걸
조금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어.
사랑에는 아마
서로에게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는 거겠지.
설명하려 들면 오히려 축소되는 마음들,
“그냥 그렇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감정들.
언젠가 우리가 서로의 사람들을 만나
지금의 이 시간을 이야기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아마 그땐 조금 다르게 말할 수 있겠지.
“그때, 우리가 서로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어”라고.
그때까지는,
누가 묻더라도 전부 설명하려 들진 않으려고 해.
다만 오늘 밤,
집에 돌아와 너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사랑을 증명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가족들이 돌아간 조용한 집에서 C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