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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E SAW Apr 29. 2019

[궁궐 이야기] 놀 줄 아는 아이들의 고궁 사용설명서

[아이와 가기 좋은 제3의 공간] 경복궁, 그리고 서울의 궁궐 이야기

[아이와 가기 좋은 제3의 공간]에서는 김남매 엄마이자 리틀홈 COO, 이나연 님이 직접 가보고 고른 다양한 공간을 소개합니다.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놀이터 중에서 익숙한 공간이지만 새롭게, 다르게 놀아볼 수 있는 공간이나 미술관 + 놀이터, 박물관 + 공원처럼 여러 공간이 결합되어 있어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 방법을 바꿔가며 다양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을 소개합니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나에겐 남산타워가, 63빌딩이, 한강의 유람선이 그랬다. 서울서 나고 자라 수없이 오가며 보았던지라 오히려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곳들이었다. 고궁은 나에게 사생대회와 현장학습의 장소였다. 덕분에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 어디나 비슷하다 지레짐작해버렸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으시리라. 하지만 아이의 손을 끌고 고궁을 다시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생경했다.


아이를 따라 눈높이가 낮아짐으로, 걸음이 느려짐으로,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함으로 더없이 멋진 놀이터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서든 놀고야 마는 놀이 대장들 덕에 나는 새로운 고궁을 발견했다.


가깝고 익숙해서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아이의 눈으로 새롭게 발견한 서울의 매력적인 놀이터 우리 고궁에서 재미있게 노는 법을 소개한다.




첫 번째 놀이

마당놀이와 골목 달리기


고궁에 관한 글을 쓰려 마음먹고, 고궁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집 남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조금 고민을 하던 큰 아이가 내놓은 대답은 ‘너른 흙 마당이 있어서’였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궁궐 마당 한편에 나무 막대기로 선을 긋고, 꽃잎과 나뭇잎을 주워 모으며 놀던 모습,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깔깔대며 쉴 새 없이 내달리던 모습이 연이어 떠올랐다. 근엄하게 솟은 정전의 위세나 단청의 화려함에 눈 돌리던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땅바닥을 훑는 것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돌멩이 하나만 있으면, 넓디넓은 스케치북으로 변하는 고궁 놀이터


딱딱한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메워진 땅을 밟는 것이 익숙한 아이들에게, 위생에 좋지 않다며 놀이터의 한 뼘 모래땅마저 빼앗긴 아이들에게, 흙바닥이 그것도 이렇게나 어마어마하게 넓은 마당이 원 없이 주어지는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고궁관리소에서 들으면 기함을 하겠으나 고궁을 즐기려고 들어섰다면 일단 냅다 달리고 볼 일이다.



고궁에서의 달리기가 더욱 재미있는 이유는 골목과 대문을 수 없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와가 곱게 덮인 지붕의 물결을 타고 이어지는 담과 골목의 끝엔 어김없이 문이 있다. 큰 문의 높은 문지방은 성큼 넘고 작은 문의 낮은 문지방은 살포시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서면 또 골목이, 그걸 따라 달리다 보면 또 문이 나온다. 건물을 주로 보는 우리와 달리 아이들은 그 사이의 틈을 누빈다. 땅바닥을 구르다 어느새 숨고 도망가기 시작하는 놀이 대장 아이들이 발견해 낸 어른들은 알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재미. 고궁에서라면 마음껏 헤매고 길을 잃어도 신이 난다.


운동장에서 뛰어놀듯 신나게 너른 흙바닥을 뛰어다니다가
사뿐사뿐 문지방을 넘나드는 재미가 있는 곳, 고궁

    


두 번째 놀이

역할놀이


아이들은 별걸 다 궁금해하곤 하는데 예를 들자면 임금님도 엄마 아빠와 함께 살았는지, 임금님도 학교를 다녔는지, 친구들이랑 놀았는지 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알아두었던 쓸데없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리저리 답을 해주다 ‘아, 여기도 사람이 살던 곳이었구나’를 새삼 깨달았더랬다.



우리가 고궁이라 부르는 이 곳은 건축문화재의 집합소이기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던 삶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고궁에 갈 때는 ‘상상력’을 꼭 챙겨가야 한다. 근정전과, 인정전 앞에선 분주히 나랏일을 논하던 임금님과 신하들의 모습을, 소주방에서는 수라상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히 오갔을 나인들의 모습을, 경회루에서는 화려한 연회의 풍악소리를, 덕수궁에서는 고종황제가 즐겼다는 커피 향기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그 순간, 지금의 우리가 이 오랜 역사 위에 함께 서있다는 것에 설렘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세월이 지나 모서리가 둥글어진 기둥을 만지며 어떤 상상을 하게 될까?


상상력을 동원하는 데엔 의상을 갖춰 입는 것이 꽤 도움이 된다. 공주놀이를 하려면 보자기라도 한 장 둘러매야 제 맛이듯 말이다. 귀찮더라도 한복을 챙겨가면 아이들 스스로가 고운 옷매무새에 흡족하여 한결 자연스럽게 공간을 즐기게 된다. 오래전 이 곳에 살았던 임금님, 왕비님처럼, 때론 용맹한 수문장, 부지런한 생각시가 되어 궁궐 곳곳을 누빌 수 있도록 진심 어린 감탄을 덧붙여 아이들을 격려해주시길.  


마치 궁궐에 사는 사람인 듯 한복을 입고 궁궐 구석구석을 누비는 재미



궁궐상상여행에 도움이 되는 책


<왕자가 태어나던 날 궁궐 사람들은 무얼 했을까>

정보: 김경화 글, 구세진 그림, 살림어린이

내용: 궁궐의 가장 큰 경사인 왕자님이 태어나는 날을 준비하기 위해 궁궐 사람들이 얼마나 분주히 많은 일을 하고 있었는지 섬세한 그림과 쉬운 말로 재미있게 쓰여진 책. 이 책을 읽고 나면 적막한 궁궐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책을 읽고 궁궐을 거닐다 보면 마치 눈 앞에 왁자지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느낌이 든다.

<해치와 괴물 사형제>

정보: 정하섭 글, 한병호 그림, 길벗어린이

내용: 궁궐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신기한 동물들. 익살맞은 표정 뒤에 숨어있는 신수들의 어마어마한 능력엔 반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상상의 동물' 해치가 살아 숨쉬는 듯한 생생한 이야기



세 번째 놀이

보물찾기


우리 가족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일단 함께 안내도부터 살펴본다. 계획 없이 뛰어노는 것도 좋지만, 가고 싶은 곳을 정하고 지도와 표지판에 의지하여 길을 찾아가는 것은 또 다른 놀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 끝에서 예상치 못한 보물을 발견한다면 더더욱!



나연 님이 추천하는 첫 번째 보물: 경복궁 집옥재

조선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엔 멋지고 유명한 장소가 많지만, 최근에 개방되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데다 궐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집옥재’를 찾아가 보자. 고종황제의 개인 서재였다는 이 곳은, 마치 조선시대 책가도를 옮긴 듯 고색창연한 멋을 뽐낸다. 현재는 도서관으로 개방되고 있어 궁궐과 역사에 관한 책들을 누구나 자유롭게 읽고 이용할 수 있다. 아쉽게도 어린이들을 위한 책은 따로 구비되어 있지 않지만 사진이나 그림이 많은 책이 많아 잘 골라보면 된다.


2019년도 집옥재 개방

특별관람구역으로 경복궁 관람시간과 별도의 관람시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개방 시간을 잘 확인하고 방문해야 한다.

운영 시간: 2019.4.1 ~ 10.31 (동절기 휴관) / 10:00 ~ 16:00, 화요일 휴궁

참고: 경복궁 공식 홈페이지


한복을 입고 역사책을 읽으며 이야기에 푹 빠져드는 아이들
한참을 앉아 책을 읽었더랬다.



나연 님이 추천하는 두 번째 보물: 경복궁 생과방

임금님의 수라상을 준비하던 경복궁 소주방 내 생과방이 다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궁중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무료체험이 열리기도 해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곳이다.


2019년도 생과방 운영

운영 시간: 2019.4.3 ~ 6.30 , 9.1 ~ 10.31 (하절기, 동절기 휴관) / 10:00 ~ 17:00 , 화요일 휴궁

참고: 한국문화재재단 공식 홈페이지


궁중 음식 체험 및 전통문화 체험이 가능한 '생과방'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오랜 여운이 남았던 그 날의 추억



나연 님이 추천하는 세 번째 보물: 창경궁 대온실

창경궁엔 유럽 어드메에 온 듯한 착각이 들만큼 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유리 온실이 있다. 궁궐 내 다른 건물들과 구분되는 외양만으로도 눈길을 끌지만 조선왕실을 수탈하기 위한 책략으로 일제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면 애틋하고 처연한 마음에 더 구석구석 눈 맞추고 머물게 된다.

운영 시간: 09:00~18:00 , 월요일 휴궁


우리나라에서, 특히 고궁에서 볼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이국적인 모습




도시엔 아이들이 마음껏 놀 공간이 부족하다는 푸념을 종종 듣는다. 나 역시 서울 한 복판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아쉬움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허나 아이들을 통해 기어코 놀고야 말겠다 마음먹으면 어디서나 놀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경복궁에서 사방치기와 역할놀이 코스튬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뛰어놀기 좋은 운동장이었다가 도서관이었다가, 신나는 타임슬립 놀이터

요즘 고궁이나 박물관에 가면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부지런히 필기를 하는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언젠가부터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는 것 = 학습이라는 공식이 성립된 것 같다. 역사현장에서의 생생한 수업이라니 학부모로서 나 역시 환영할 문화지만, 쏟아지는 정보를 받아 적는데 바쁜 심드렁한 몇몇 아이들이 표정을 보곤 고궁의 진짜 의미와 아름다움, 즐거움을 찾을 기회를 되려 놓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아이들의 놀이를 어렵게 하는 데엔 공간의 부재보다 마음의 부재가 더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조선왕조의 역사를 줄줄 읊기 전에, 고궁과 제대로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처럼 걷고, 뛰고, 먹고, 놀고, 자고 깨며 기쁨과 슬픔을 겪으며 살았던 이들이 먼저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어떨까. 세종대왕의 애민의 마음이, 명성황후의 애끓는 스러짐이 더 깊이 새겨지지 않을까.


우리 궁궐이 아이들에게 고루한 문화재, 뻔한 관광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즐거운 기억이 켜켜이 쌓인 언제라도 달려가고 싶은 신비롭고 신나는 타임슬립 운동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온 마음으로 이 곳을 사랑할 수 있게.


오늘, 아이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일 고궁에 대한 즐거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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