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E SAW Sep 18. 2019

1. GPS와 통행일지가 말해주는 것들

[놀세권 연구자의 동네 놀이 풍경 관찰기] 1. 놀이의 관점을 동네로

[놀세권 연구자의 동네 놀이 풍경 관찰기]는 C Program에서 후원한 동네 놀이환경 진단도구 개발 연구, 일명 '놀세권 연구'의 연구자 중 한 명인 최이명 박사가 연구를 통해 수집한 94명 아이들의 GPS 데이터(동선)를 추가 분석하며 발견한 이야기를 에세이로 전합니다. 관찰기 시리즈가 오늘의 대도시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놀이 행태를 이해하고 동네 놀이 풍경에 대한 흔한 오해를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길 바랍니다.



아이들의 놀이 행태를 보신다면서, 

왜 하루의 생활을 다 적고 GPS까지 들고 다녀야 하나요?


현장에 나가 연구 참여자들을 모집할 때, 아이의 어머니들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다. 사실 이 연구방법론의 근본적인 속성을 파헤치는 예리한 질문인지라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 답변이 장황해진 적이 많다. 당시에 내가 했던 대답들은 대략 이렇다.      

   

"일주일 정도는 관찰해야 아이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자주 노는지가 패턴으로 나타납니다."

"어디서 노는지 만큼이나 어디 가는 길에(또는 어디서 오는 길에), 누구와 노는지가 놀기 좋은 동네인지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힌트를 주거든요."

"동네를 다니는 과정에서 아이에게 놀이터 외에 어떤 다른 기회들이 주어지는지 함께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이가 동네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혼자 다니는지 살펴보면, 부모들이 동네를 얼마나 안전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어요. 요즘에는 놀이와 가장 직결된 문제가 안전에 대한 염려인 것 같아서요." 


도무지 만족스럽지가 않다.  


시-공간 결합 자료의 중요성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은 없지만, 설문과 인터뷰를 촘촘하게 구성한다면 굳이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동네에서 아이들이 주로 노는 장소가 어디이며, 언제 그곳에 가는지, 아이의 부모들이 동네 환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면 이 자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대 장점은 무엇이었나,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통행 일지를 보면,


통행 일지에는 연구에 참여하는 아이가 처음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최종적으로 귀가할 때까지 방문한 모든 장소의 이름, 출발-도착시간, 장소까지의 이동수단과 동행한 사람, 각 장소에서의 주요 활동(놀이 활동의 경우 누구와,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까지)이 부모의 도움을 받아 기록된다. 


이 정보가 GPS상의 경로와 결합되면,

비로소 한 아이의 동네 생활패턴의 흐름이 지도상에 복원된다. 


아이가 자주 다니는 길과 놀이장소 전후로 연결된 공간과 활동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놀 수밖에 없는 이유, 즉 놀이의 기회가 만들어지는 동기를 함께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했던 것 같다. 물론 100%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발견한다기보다는 어떤 징후를 포착하는 수준이지만, 많은 아이들로부터 공통적으로 같은 현상이 발견된다면 이것은 동네 공간구조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사례로 만나보는 놀이 기회의 차이  


사례 1. 학교까지의 거리, 놀이 기회의 차이

OO 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A는 평일 오후 4-5시 사이에 단지 내 놀이터로 매일 놀러 나간다. 늦은 저녁을 먹기 전까지 팽이와 딱지놀이, 잡기 놀이, 자전거 타기 등을 2시간가량 한다. 고정적으로 함께 노는 친구와 동네 형들이 있지만, 멤버는 조금씩 바뀐다. 반면, 학교와 10분 정도 떨어진 다른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B는 평일 귀가 후에는 가족들과 가끔 산책을 나가는 것 외에는 별로 나가 놀지 않는다. 


놀이터가 갖춰진 아파트 단지라면 어느 정도 비슷한 놀이 환경을 가졌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위 현상은 같은 아파트 단지라도 학교까지의 거리에 따라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A가 사는 단지는 학교 바로 앞이다. 거기에는 학교를 마치고 학원시간이 되기 전에, 또는 학원을 마치고 놀다 가려는 친구들로 항상 북적인다. 길 건너 골목길 쪽에 놀이터가 없으므로, A는 집 앞에 나가면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자신이 사는 단지 내 친구들, 옆 단지 친구들, 그리고 골목에 사는 아이들까지 거의 다 만날 수 있다. 


반면 B의 경우 학교가 멀리 있으므로 친구들이 자신의 아파트 단지 내로 놀러 오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B가 집에 왔다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A가 사는 단지 쪽으로 다시 가야 하는데, 골목길을 통과하여 간다는 것이 부모가 함께 하지 않는 이상 저학년에게 쉽지 않다.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시설과 개수 면에서는 A와 B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동네에서는 학교에 가까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놀이시간 확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실제 샘플조사 결과에서도 B가 사는 단지보다는 A가 사는 단지에서 하루 한 시간 이상 노는 아이들이 더 많이 발견되었다.  


친구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는가에 따른 놀이 기회의 차이 (출처: 연구팀)

    

사례 2. 방과 후 수업을 기다리며 노는, 학교 운동장

OO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았던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정규 수업시간과 방과 후 프로그램 사이에 비는 시간이 있다는 점이다. 반면 다음 일정을 위해 대기하지 않는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경우는 전혀 없었으며, 하교 후 다시 학교 운동장으로 와서 노는 사례 역시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초등학교가 있는 지역은 경사가 비교적 심한 구릉지로서 재개발된 아파트 단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초등학교가 비교적 낮은 지대에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단지 경계부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 경사지의 특성상 아파트 내에는 작은 놀이터들이 계단 사이로 미로처럼 숨겨져 있기 때문에 공놀이 등을 할 수 있는 장소로서 학교만큼 좋은 곳을 찾기 어렵지만, 이러한 여건에서 아이들이 하교 후 다시 학교로 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학교 운동장의 공통적인 사용행태는 학교가 놀이 활동에 불리한 입지에 있음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사례 3. 골목길이 놀이장소로 활발하게 사용되는 특수한 경우

OO동에 사는 C의 기록에서는 특히 골목길에서 논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같은 동네의 비슷한 환경 속에 있는 아이들에게 골목에서의 놀이는 상당히 드문 빈도로 나타나거나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C의 할머니는 동네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계시며, C가 같이 논 상대는 주로 동네에 살고 있는 친척 어른들이나 사촌형제들이다. 가족들은 평일에도 할머니 댁에 자주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해가 질 때까지 가게 앞 골목길에서 공놀이와 배드민턴 등을 즐긴다.  


C의 경우 골목길이 놀이장소로 사용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언제나 확보할 수 있는 친척 어른이나 사촌과 같은 가까운 놀이 상대가 있다는 점, 그리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실내공간이 함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례만으로 “아이들이 여전히 골목을 놀이장소로 사용하고 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함께 놀 상대를 항상 확보할 수 있고, 커뮤니티 공간과 같은 비빌 언덕이 있다면 길과 같은 제3의 공간이 놀이장소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 요즘의 골목길에 대한 조금 더 현실적인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골목이 놀이에 활용될 수 있었던 특별한 이유, 가족 (출처: 연구팀)


때로 통행 일지상에 드러나는 아이가 같이 논 상대나 동행인에 대한 정보는, 아이가 놀았던 장소가 이 동네 아이들에게 보편적이고 자발적으로 이용되는 장소인지, 또는 목적성을 가지고 어른이 데려간 장소인지, 아니면 아이가 가진 특수한 인적 자원 덕분에 유효한 놀이공간으로 사용될 수 있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짐작하게 해 준다.




놀이환경을 보는 관점이 동네 단위로 확장되길 기대하는 이유


아이들 놀이를 특정 장소 내에서의 활동으로만 한정한다면, 힘들게 아이들의 발자국을 따라다니는 작업을 하고 있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보다 많은 아이들을 놀이터로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특정 놀이터 내부의 질적 개선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어떤 놀이터는 왜 항상 붐비고, 어떤 놀이터는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는데도 아이들이 오지 않는가? 이런 종류의 의문은 아이들이 만들어낸 동선 속에서 놀이 활동 전후와 연결된 상황이나 자주 다닌 길과의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동네 곳곳 어딘가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놀이 풍경 (출처: 연구팀)  


놀이환경을 보는 관점이 동네 단위로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한 발 물러서서 동네 전체를 보았을 때 아이들이 그들의 생활영역 안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GPS와 통행 일지는 실제로 사용된 동네 놀이 자원을 가감 없이 노출시킨다는 점에서 동네 자원의 실질적인 총합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서울의 4개 지역에서, 아이들은 그들의 동네를 종일의 이동경로를 통해 샅샅이 밝혀주었다. 아이들이 간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시간, 대상, 공간의 부족이 한데 얽혀 만들어내는 놀이 결핍)과 함께, 그들이 영위하는 진짜 놀이 환경과 마주하게 된다. 


지역사회의 놀이환경 개선은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증 자료를 통해 동네 단위로서 놀이 환경을 보는 관점이 더 많은 아이들이 놀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동네 전체가 놀이터가 되는 그 날까지! (출처: 연구팀)

글: 최이명 도시계획학 박사


본 에세이는 2018년 최이명, 김연금 외 2인의 연구자가 씨프로그램의 의뢰를 받아 진행한 '동네놀이환경진단도구개발' 연구과정에서 나온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작된 결과물입니다. 본 자료를 무단 도용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 동네에 적용해보기


1. 우리 아이 통행일지 적어보기

아래 통행일지를 보며 동네에서 아이들이 어떤 경로로, 누구와 함께 어디를 어떻게 다니는지 떠올려보자.

아이들이 간 길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가? 


통행일지를 적은 후 집 반경 1km 지도 위에 표시해보면 동선을 그려볼 수 있다.


본 자료는 2018년 최이명, 김연금 외 2인의 연구자가 씨프로그램의 의뢰를 받아 진행한 '동네놀이환경진단도구개발' 연구 과정을 통해 제작된 결과물입니다. 본 자료를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2. 놀세권 체크리스트로 우리 동네 진단해보기

우리 동네가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동네인지 자가 진단해보는 간단한 체크리스트를 소개한다. 


놀세권 체크리스트 소개 : http://c-program.org/playground

놀세권 체크리스트 다운로드 받기:



놀세권 연구자의 동네 놀이 풍경 관찰기 

지난 에세이 보기


0. 들어가며: https://brunch.co.kr/@weseesaw/147


연구 결과 영상으로 만나보기



'GPS와 통행일지가 말해주는 것들' 글 어떠셨나요?

아이들과 즐길 수 있는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놀이터,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제3의 공간과 놀이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가 매주 목요일 여러분의 메일함으로 찾아갑니다. 


>> 뉴스레터 구독하기

>> 지난 뉴스레터 읽어보기

>> 우리 동네 놀세권 더 자세히 알아보기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들이 말하는 '나는 이렇게 놀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