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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애인

신달자

by 전익수

약 10년전 쯤에 개봉한 '건축학 개론 '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영화였습니다. 순진한 나머지 사랑의 감정 표현에 서툰 영화속의 남자 주인공에게서 대한민국의 찌질이를 보았습니다. 그 찌질이가 바로 젊은 시절의 바보 나였구나를 깨닫고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며 허전한 미소에 아쉬워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1943년생인 신달자 시인의 에세이집 '백치애인'은 1988년에 발행되었습니다. 작년 초에 미국 LA에 사는 지인의 &Lab 갤러리를 방문했다가 한켠에 놓인 책장의 많은 책 중에서 눈에 들어온 이 책을 빌렸습니다.

건축학 개론을 능히 넘어선 사랑의 깊이를 한편의 짧은 에세이에서 발견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지금도 여전한 나의 부족함에 부끄러움을 느낌니다.

[백치애인]

나에겐 백치 애인이 있다.

그 바보의 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를, 그리워하는지를 그는 모른다. 별볼일없이 우연히,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나게 될까 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서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 다방에서 다방문이 열릴 때마다 불길 같은 애수의 눈을 쏟고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길거리에서 백화점에서 또는 버스 속에서 시장에서, 행여 어떤 곳에서도 네가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 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선 그는 아무것도 볼수 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내게 한마디 말도 해오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 이다.

바보 애인아. 너는 나를 떠난 그 어디서나 총명하고 과감하면서, 내게 와서 너는 백치가 되고 바보가 되는가.

그러나 나는 백치인 너를 사랑하며 바보인 너를 좋아 한다. 우리가 불로 만나 타오를 수 없고 물로 만나 합쳐 흐를 수 없을 때, 너는 차라리 백치임이 다행이었을 것이다. 너는 그것을 알 것이다.

바보 애인아. 너는 그 허허로운 결과를 알고 먼저 네 마음을 돌처럼 굳혔는가. 그 돌 같은 침묵 속으로 네 감정을 가두어 두면서 너는 백치가 되어서 사랑을 영원하게 하는가.

바보 애인아. 세상은 날로 적막하여 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큰 과업처럼 야단스럽고 또한 그처럼도 못하는 자는 절로 바보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그래, 바보가 되자. 바보인 너를 내가 사랑하고 백치인 네 영혼에 나를 묻으리라.

바보 애인아. 거듭 부르는 나의 백치 애인아. 잠에 빠지고 그 마지막 순간에 너를 부르며 잠에서 깬 첫 여명의 밝음을 비벼 집고 너의 환상을 쫓는 것을 너는 모른다. 너는 너는 모른다. 정말이지 너는 바보, 백치인가.

그대 백치이다. 우리는 바보가 되자. 이 세상에 아주 제일 가는 바보가 되어서 모르는 척하며 살자. 기억 속의 사람은 되지 말며 잊혀진 사람도 되지 말며 이렇게 모르는 척 살아가자. 우리가 언제 악수를 나누었으며 우리가 언제 마주 앉아 차를 마셨던가. 길을 걷다가 어깨를 부딧고 지나가는 아무 상관없는 행인처럼 그렇게 모르는 척 살아가는 거다.

바보 애인아. 아무 상관없는 그런 관계에선 우리에게 결코 이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의 애인이다. 백치 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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