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대도시의 외곽인 시골 그린벨트 지역이었다.
국민학교는 40~50분을 산 넘어 걸어 다녀야 했고,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다. 우리 삼남매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집 앞 땅에서 고추, 오이 이런 걸 농사지으셔서 파셨던 걸로 기억하고 할머니는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시래기를 삶아 버스 타고 시장에 나가 파시기도 하셨다.
그러다가 집에서 버스 한 정거장 거리 땅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셨다.
포도, 딸기, 수박, 참외 이런 과일들을 키우셨고, 원두막을 지어 재배 작물을 현지에서 파셨다.
엄마 아빠가 낮에 안 계실 땐 할머니가 우리를 케어해 주시다가 급기야 할머니가 원두막에서 주무시며 본격적으로 과일들을 파시기 시작하셨고, 엄마 아빠는 해 질 녘에 들어오셨다. 할머니와 엄마는 자식교육열이 높은 게 닮았는데, 그 무렵 우리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기 시작해 과일 판매는 자신이 할 테니 엄마는 우리들에게 신경 쓰길 바란 할머니의 배려인 것 같다.
그렇게 그곳에서 과일들을 키우며 팔다 내가 중학교 때 그 원두막 자리에 1층은 오리고기 식당, 2층은 가정집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지었다. 엄마 음식 솜씨가 좋아 장사는 잘 됐다.
2000년대 중후반 즈음 1,2층 모두 식당으로 바꿔 갈비를 팔았다. 식당에 종업원도 많았다.
아빠가 사장님이고 엄마는 요리사. 직원들 관리도 엄마 담당이었다. 가끔 동생이 식당 정산이나 집안일을 도왔다.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 때 돌아가셨다.
부모님은 건물 내 직원휴게실을 개조하여 사셨고, 언니는 결혼하여 지방으로, 난 서울에서 자취, 동생은 인근 고모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렇게 살아왔다.
아빠는 지독히도 술을 좋아하셨다. 늘 너무 힘들다며 술을 드셨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은 취해있었고, 늘 엄마에게 불평불만과 욕을 늘어놨다. 엄마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엄마를 안타까워했다.
아빠는 집안 종친회와 땅문제로 8년에 걸친 법정 싸움을 한 바가 있는데, 대법원까지 갔다가 패소한 경험이 있다. 이후 같은 동네에 사는 그들에게 패배감을 이기지 못해 술과 한탄은 더 늘어갔으며, 그 스트레스는 가족들에 대한 괴롭힘으로 돌아왔다.
우리 삼남매는 그런 아빠에 대처하는 방법이 각각 달랐다. 언니는 아빠가 원하는 말들을 해주고 기분을 맞추어 주었다. 둘째인 나는 입을 닫는다. 언니와 달리 난 아빠가 무슨 말만 하면 눈물부터 났고,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아빠에게 꼬투리 잡혀 나에 대한 공격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막내인 동생은 남자라서 말없이 듣고만 있기도 하고, 가끔은 의견을 얘기하기도 했다.
아빠는 특히 동생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했다. 같은 남자라서 그런 걸까?
괴팍하고 폭력적인 아빠에게서 엄마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생각이 깊었다. 아빠를 대하는 자신의 행동의 결과가 엄마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가 원하거나 시키는 것들을 모두 했다. 안 그러면 아빠가 엄마를 닦달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도 동생도 가스라이팅해왔다.
가게를 하시면서 아빠는 '사장님' 소리가 좋았다. '사장님'하며 자신에게 굽실대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인심을 베풀었고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주변에는 아빠의 지갑을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몰려들었다. 아빠는 사회생활 경험이 없어 그런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주사를 부리고 민낯을 다 보였다. 그러면 얼마 못 가 먹이를 배불리 주워 먹은 하이에나들은 다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주변인들은 다들 떠났다. 자기가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곁에 있는 엄마뿐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빠의 욕설과 폭력을 보아왔던 우리는 다 커서 엄마에게 이혼도 얘기해 보았으나, 아빠를 감당해야 할 자식들을 생각해 이혼만은 생각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견디며 제대로 발 뻗고 잠도 못 자고 하다 보니 수십 년 쌓인 그 노곤함과 스트레스가 몸으로 왔다. 안면마비와 이석증이 왔다.
아빠에게 '사장님' 소리를 안겨준 가게를 계속 경영하기에는 엄마의 몸 상태가 경고등을 킨 것이다.
그나마 부모님 가게 근처에 살며 가게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동생만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객지 생활을 하는 탓에 난 뒤늦게 이런 상황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가게를 지으며 끌어 쓴 대출에 가게 경영하며 대출이 늘어나다 보니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라 했다. 농사만 지었던 분들이라 돈에도 샘에도 어두워 경영은 존재하지 않았다. 매출을 올리기 위해 가게 메뉴를 더 추가하곤 했다. 빚은 계속 늘어가고 있었고, 그렇다고 이 가게를 팔 생각도 없으셨다.
한 달에 갚아야 할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그런데도 아빠는 엄마에게 생활비 한 푼 주지 않았고, 마이너스 통장의 돈은 내 돈이라 생각하며 급기야 수백만 원어치 낚싯대를 사고 돈 쓸 궁리만 했다. 가게 상황과 쪼들어가는 살림살이를 얘기해도 믿지 않았다. 엄마는 마이너스 통장에서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었다.
사실 난 그때까지도 대출원금 액수를 정확히 몰랐는데, 그저 가게를 처분하지 않는 한 원금은 갚을 수 없는 수준이라고만 들었다. 아빠는 자기가 평생에 걸쳐 일군 노력의 결정체인 이 건물을 포기할 수 없었으며, 하루하루 늘어가는 이자는 또 대출받아 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무렵 아빠는 농협조합원이라 비교적 저렴한 이율로 대출을 손쉽게 받아쓰고 있었다. 어떻게든 생활비를 마련하려는 엄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출은 갚아야 할 빚이 아니라 자기 돈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 엄마는 이 무렵 보험이며 통장이며 다 깼을 거다.
엄마의 건강 이상, 그리고 나날이 늘어가는 빚.
우린 부모님과 더 이상은 가게 경영은 무리라 얘기했다. 매매할 생각은 전혀 없으시니 세를 주기로 했다.
냉면을 파는 식당에 세를 주었고 그 돈으로 한 달 이자와 부모님 생활비를 마련했다.
부모님은 일선에서 물러나서 가게 옆에 있는 밭에 농막을 짓고 하루의 대부분을 꽃이며 나무며 예쁘게 가꾸고 파며, 오이며, 토마토며 갖가지 농작물을 키우셨다. 강아지며 닭도 키웠다. 그 밭은 가게 주차장과 이어진 곳이라 가게가 훤히 보였다. 그렇게 아빠는 남의 손에 맡겨둔 자신의 왕국을 관찰하러 매일매일 텃밭에 나가기 시작했다.
아빠 눈에는 세입자가 경영하는 가게에 아쉬운 점만 보였다. 늦은 시간인데 간판 불을 안 켰네, 건물 입구에 있는 감나무는 대체 왜 잘랐는지... 결국 그 냉면집을 하던 세입자는 5년 뒤 시어머니 같은 아빠의 등쌀에 못 이겨 나갔다.
그다음으로 중국집이 들어왔는데, 짜장면 2900원이라는 획기적인 가격을 선언하였고 자리가 없을 정도로 잘 되었다. 그런데 일부 불법 시설물이 있었는지 그것이 구청에 신고가 들어갔고, 이후 해물칼국수로 종목을 바꿨는데 아쉽게도 코로나가 덜컥 터져버렸다. 손님은 급감했고 다달이 들어오던 월세가 밀리기 시작했다.
코로나라는 상황을 감안해서 배려를 해주었음에도 불구, 계속 월세가 안 들어오다 보니 대출이자와 생활비가 해결되지 않아 부모님은 또 대출을 받아 이자를 냈다. 하필 금리도 치솟아 한 달 이자만 700만 원 가까이 되었다. 생활비는 고사하고 대출이자 내는 것도 어려웠다. 세입자는 연락도 잘 안 받았다.
어떻게 어떻게 대출을 계속 끌어와 이자를 갚고 있지만, 더 이상은 여력이 없었다. 이러다 경매라도 넘어가면 답이 없었다. 아빠는 계속 밥대신 술만 마시며 월세를 안내는 세입자 욕만 하고 있었고, 저 가게 내가 다시 하면 돼! 라며 어떻게든 현실을 타개할 생각보다는 자신의 왕국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늘 그랬다. 항상 모든 사태의 수습은 동생과 엄마가 했고, 아빠는 늘 누군가에게 사태의 원인을 뒤집어 씌워 욕하고 분노했고 감정을 이기지 못해 술을 마시고 주무시고 깨면 또 술을 마셨다.
그렇게도 평생 술을 달고 사는 아빠는 이상하리만치 건강에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재작년 건강검진에서 위에 암이 발견되면서 위를 절제했다. 내가 국민학교 때 아빤 위를 1/3 정도 절제하셨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위를 제거했다.
수술 이후로 그렇게도 음식들을 잘 못 드시면서 살이 급격하게 빠지고 기력이 상실되어 이젠 걷는 것도 힘들어하신다. 주춤주춤 걷다 보니 횡단보도를 건널 때 파란불 신호 내에 건너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운전도 이제는 어렵다. 주차할 때 남의 차를 박는 일이 허다하다. 작년만 해도 한 달 새 5건 박은 것 같다. 경찰도 많이 와고,
엄마가 차주에게 죄송하단 말도 수없이 했다. 물론 아빠는 그런 아쉬운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기력이 쇠하는 데도 불구하고 지금 세입자 나가면 내가 다시 가게를 하겠노라 천명하신다.
동생과 올케와 우리가 해보는 건 어떨까 라는 얘기도 해보았다. 넓은 주차장 부지와 외곽에 위치해 있는 점을 고려하여 커피숍 정도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으로서도 은퇴 후를 생각했던 것 같다. 세입자만큼의 월세를 부모님께 드리고 우리가 생활할 정도가 되겠는가? 그때 내가 배우던 커피선생님께 상의드려보았고, 답변은 투자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점이었다. 외곽에 있다 보니 그저 그런 커피만 파는 걸로는 망하기 십상이고, 가족 단위 나들이를 고려한 음식점 또는 브런치카페 등이 좋겠다 했다.
자금력 없는 우리들이 대출을 받아 새로운 시작을 해보는 모험을 하기에 우린 너무 초짜였고, 잘못하다간 부모님, 동생, 나 세 집이 다 같이 쫄딱 망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빠의 간섭이 가장 문제였다. 그것을 감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속하리만치 코로나 시국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월세를 내지 않는 세입자만 탓하고 있기에는 현실이 최악이었다. 원금은 고사하고 금리상승으로 달마다 늘어가는 대출이자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가게 처분 결정을 내렸다.
가게를 내놨다. 가게는 뻥 뚫린 사거리에 위치해 있어 자리가 좋았는데, 커피숍하려는 자영업자들의 문의가 많았다.
그러나 계약 단계에 가면 모두 틀어졌다. 아빠는 자신이 내놓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막상 팔려고 하면 그 돈을 받고 헐값에 팔 수 없다는 거였다. 물론 이해는 된다. 누구라도 더 좋은 가격을 받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배짱을 부리기에는 코로나 시국에 가게를 사려는 문의가 점점 줄어들어드는 상황이라, 더 이상 원하는 가격을 고수할 수는 없었다.
몇 개월 버텼지만 마이너스 통장으로 확보한 돈도 떨어져 가는 마당이라 몇 개월 안에 해결해야 했다. 문의도 끊기다 보니 동생의 설득 끝에 가격을 더 낮추어 내놓았고, 결국 근처 재개발 예정 지역의 음식점 사장이 이쪽으로 옮겨오려고 사기로 하였다. 건물뿐만 아니라 아빠의 텃밭 등 1000평 넘는 아빠의 왕국을 모두 사기로 한 것이다. 물론 아빠는 말도 안 되는 금액에 넘겨야 한다는 현실이 아프고 속상하셨을 거다. 매일 술로 지새우셨다.
그래도 그 금액이면 지금껏 벌려온 대출금은 다 갚고 부모님이 노후 충분히 쓰면서 생활하실 수 있을 정도는 충분히 되었다. 세금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지만.... 동생의 지인인 부동산 중개인, 세무사들이 동원되어 진행이 빠르게 이루어져 갔다. 아빠가 가게 주변이며 주차장이며 곳곳에 공들여 해놓은 조경도 넘기기로 했고, 이는 계약서에 기재하기로 했다.
그런데 계약 당일, 아빠는 조경은 안 되겠다 하셨다. 알고 보니 며칠 전 누군가로부터 근처에 내놓은 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신 후, 그곳에 자신의 조경들을 모두 옮겨야겠다고 마음이 바뀐 것이다. 난처하긴 했지만 그렇게 하기로 하고 조경을 제외한 나머지를 사기로 했고, 조경들은 모두 9월 말까지 비워주기로 하였다.
아빠는 새로운 땅을 사서 거기에 자신의 보물들인 지금의 나무들 바위들 모두 옮겨 제2의 왕국을 짓고 텃밭도 가꿀 생각이셨다. 뭐 하러 돈 들여 땅을 또 사고 고생하나 싶었으나, 아빠의 취미이자 생활인 왕국짓기를 반대할 수는 없었다. 물론 엄마는 지긋지긋한 농사짓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빠의 계획을 반대해 아빠의 취미거리가 없어진다면 분명 우울증과 엄마에 대한 가해가 심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땅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이사하기로 했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9월 말까지 땅을 찾아 계약하고 모든 짐들과 조경들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열심히 땅을 보러 다니셨다.
동생은 동생대로 인터넷을 통해 땅을 찾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부모님을 모시고 땅을 보러 갔다.
어느 날 동생이 나에게 아빠가 내일 무슨 땅을 계약하기로 했다며, 아무래도 기분이 찜찜하다며 그 땅을 보러 가보자 했다. 그곳은 지금 사는 곳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동생이 인터넷에 내놓은 부동산에 연락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반응이 심드렁했다. 팔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 땅 내놓은 지 오래된 땅이라며 거기 무덤이 있는 건 아시는 거죠? 했다. 직접 가보고는 경악했다. 산비탈의 땅이었고 큰 존재감을 차지하는 무덤이 있었다. 부동산을 만난 결과, 이장 계획도 없을뿐더러 무연고자 무덤까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접었다. 아빤 사기꾼에게 말려들었던 것이다. 계약 전날에 막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빤 과시욕이 있다.
지금의 텃밭에서도 나무를 심고 예쁜 꽃들을 가꾸었다. 과실수부터 이름 모를 종류의 나무들을 가꾸시고, 갖가지 야생화와 종류별 장미 등을 가꾼다. 연못을 만들어 수련도 키우신다. 그림을 그리셨던 분이라, 이것들의 조화가 아주 아름답다. 주변을 지나가는 산책객들은 와서 사진도 찍고 '사장님 너무 예쁘게 잘 가꾸셨다'며 칭찬을 날렸고, 이런 말들에 으쓱했다.
한쪽에는 하우스를 지어 오이며 가지며 고추며 토마토 등을 키우는데, 가끔 우리가 놀러 가서 따오곤 한다. 거의 야채를 사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가끔 산지에서 키운 그 농작물들을 사람들이 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전화로 '야, 오늘 오이 3만 원어치 팔았어'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아빠는 이런 걸 하고 싶으신 거다. 사기꾼이 소개한 땅은 오히려 비탈이라 잘 보일만 했고, 무덤도 이장한다는 말을 믿었고... 그러나 부동산과 만나 모두를 확인한 후 머릿속에 그리던 제2의 왕국에 대한 그림은 와장창 산산조각 나버렸다.
아빠는 계속 이곳에 사셔서는 안 되었다.
아빠는 미래지향적이기보다 과거를 자꾸 회상하는 분이라 때문에 종친회와의 지리지리한 법정 싸움으로 친척들에게 받은 상처, 그리고 남의 손에 넘어간 자신이 평생 가꾼 왕국을 보면 남은 생애 그 억울함과 분함을 곱씹으며 패배감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했고 우울증이 더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동생은 지하철 라인 근처로 개발 안된 곳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동생과 나는 서구에 살고 있는데, 이곳은 아주 예전에는 시골 땅이었지만 비교적 최근에야 신도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 덕에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발이 가장 늦은 곳이다. 찾으려 마음먹으면 개발제한구역의 땅들이 있긴 했다.
부모님 연배를 생각했을 때 이젠 우리 주변으로 모시고 와야 할 것 같았고, 이젠 운전을 하면 안 될 걸 알에 지하철 이용을 고려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다. 무엇보다 유사시에 우리가 달려갈 수 있었다.
물론 태어나 80 평생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빠의 상태를 고려할 때 하루빨리 모두 털고 새로운 곳에서 제2의 왕국을 건설하는 재미로 살아야만 했다.
이쪽으로 나온 땅들을 모두 보고 다녔다. 생각보다 아빠의 심사기준은 너무나 엄격했다.
아무리 조건의 좋은 땅도 나무나 바위를 가져올 15톤 트럭이나 땅을 돋울 덤프트럭이 들어오지 못하면 통과하지 못했다. 당연히 일반 농지들은 탈락했고 최종 두 곳이 후보에 남겨졌다.
한 군데는 장애인학교 근처, 한 군데는 예비군 훈련소 근처.
모두 그린벨트 내에 있는 농지인데, 기피시설들이 있는 곳이지만 어차피 투자개념으로 사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았다.
고민이 진행되었고, 장애인학교 근처 낙찰!
부모님이 사실 아파트도 그 근처로 몇 군데 둘러보았다.
장애인학교 근처 땅은 일부 분할하여 팔기로 한 건데, 땅주인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분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빠가 원하는 부분은 길가에 인접한 노른자 땅이었는데, 땅주인은 그 부분은 자식들에게 상속할 거라며 뒤쪽 땅을 팔기를 원했다. 결국 1억이 넘는 웃돈을 얹어주고 원하는 곳을 사기로 했는데, 매매 당일 아빠는 또 변덕이 왔다.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아빠가 매매를 취소하겠다는 것이다.
계약하러 가야 하는데 이미 취하셨다. 동생이 출동했고, 한참 뒤에 동생이 혼자 혼이 빠진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결과적으로는 계약서에 도장은 찍었고, 그 과정에서 아빠의 변덕으로 부동산 중개인과 다툼이 있었다 한다. 아빠는 부동산과 우리들이 한통속이 되어 비싼 돈으로 땅을 사게 만든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이 화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자신은 그 땅을 살 생각도 없었는데 늬들이 원하는 대로 그 땅 그렇게 샀으니 늬들이 알아서 하라고 윽박이다.
80 앞둔 기력 없는 할아버지에게는 나무들을 옮겨 새 왕국을 건설하기엔 몸도 마음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짜증만 날 뿐이다. 이 짜증은 매일 계속되고 있어, 엄마도 동생도 매일매일 마인드컨트롤 중이다.
아빠의 취미생활 용도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 땅은 나중에 '아빠 돌아가시면 팔아버리자'에 엄마와 우리들은 이미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아파트는 9월 중순에 이사하기로 하였고, 아빠의 땅 정리는 9월 말까지 하기로 하였다.
아빠 머릿속의 새로운 왕국에 대한 그림은 매우 거창하고 구체적이다.
그러나 이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아빠 만의 몫이다.
그걸 다 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돈 주고 해달라고 하면 돼!'라며 호기롭게 얘기하지만,
한 달 남짓 남은 기간 동안 해야 할 세부적인 디렉팅에 사실 좀 겁먹은 것 같기도 하다.
세금 계산을 하고 놀랐다.
와, 이래서 재벌들이 세금 덜 내려고 미친 듯 꼼수를 부리는구나 싶었다. 나라가 해준 게 뭐 있다고 살 때도 팔 때도 이렇게 가져가는가. 몇십억 되는 대출을 갚고, 세금을 내고, 땅을 사니 남는 건 거의 없다. 허탈하다. 전 같은 생활은 할 수 없지만 팍팍하게나마 살아갈 수 있긴 하다.
이런 걸 보면 우리 아버지 대단하다.
부모님은 몇 십 년에 걸쳐 돈이 생길 때마다 땅을 야금야금 사셨다. 개발제한구역이라 언젠가 개발되겠지 하며 사 모은 거다. 개발소식만 기다렸는데 끝내 원하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이렇게 남에게 넘겨줬다.
그 왕국은 우리 가족을 현재에 있게 한 터전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난 내가 다닌 국민학교도 없어졌고, 내가 낳아 자란 시골집도 흔적도 없이 허물어 없어졌다. 난 어렸을 적 앨범들도 없다. 내 과거의 흔적들은 그렇게 남아있질 않은데, 이렇게 우리 가족의 오랜 삶의 터전이었던 왕국을 떠나야 한다 생각하니 몇 십 년간 우리를 키워준 터전이 없어지는 것만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
동생에게 들었는데 엄마는 부동산 계약서 도장 찍을 때 눈물을 흘리셨다 한다.
아빠는 더 할 거다. 평생을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야 한다는 마음에, 일종의 패배의식도 있으신 듯하다.
이제부터 새롭게, 재밌게 제2의 왕국을 만들면서 살면 된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으시나 보다. 앞으로의 과정도 순조롭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평생 운전만 하던 아빠가 요즘 지하철의 맛을 처음 보셔서 운전보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시는데, 그런 사소하나마 작은 기쁨조차도 새롭게 느낀다는 사실이 못내 흐뭇하다. 그렇게 나머지 여생 동안 당신이 꿈꾸는 제2의 왕국을 만들며,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만 하셨으면 좋겠다.
부모님의 새로운 집에서 맞이할 이번 추석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