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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Apr 29. 2020

어째서 좋았을까.

# 알기는 오래 알고 좋아한지는 얼마 안 된 친구와의 첫 여행이었다. 우리는 오래된 캠핑카를 비싸게 빌려서 둘 다 가보지 못한 어딘가 뚜렷한 목적지 없이 떠날 계획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처음인 여행이라 막상 날짜가 다가오자 불안과 걱정이 어떤 두려움으로 변했다. 나는 며칠 동안 너무 긴장하고 설레어하다 막상 여행 날에는 가라앉아 버렸다. 가슴이 두근대다 못해 나중에는 막 울렁대고 있었다.    

 

# 주말 아침에, 집채를 등에 인 달팽이처럼 느리고 불안하게 우리는 출발했다. 캠핑카는 크고 높고 무겁고 느리고 예민한 교통수단이었다. 낮은 방지턱을 넘을 때에도 살림을 깨부수는 소리가 났다. 좌회전 우회전을 엉금엉금 더듬어하는데도 커튼과 냄비와 창문과 화장실 문과 온갖 잡동사니들은 제각각 소리를 질러댔다. 차를 몰던 그 애는 삼십 분 만에 얼굴이 노래졌다. 나는 조심하라는 말만, 그 애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며 오후가 다 갈 때까지 서쪽이고 남쪽인 곳으로 느리게 달렸다.


# 당진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당진으로 갔다. 남쪽 중에 동남쪽은 비가 온다니 서남쪽으로 가던 중에 당진 그쯤이면 여행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써 어두워졌기 때문에 이제 어딘가에는 우리가 끌고 온 집을 세워놓고 밥도 지어먹고 잠도 자야 했다. 적당한 곳을 찾느라 당진의 끄트머리를 이리저리 누볐다. 거기에 바다가 있었다.

서울에는 없는 너무 깜깜한 밤이었으므로 풍경 같은 건 보이지 않아 사실 어디에 정박해도 다를 게 없었다. 서해의 어느 부두, 식당들이 문을 닫은 비릿한 내가 나는 아스팔트 위에 차를 세웠다. 화로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밥을 먹었다. 길 위에서 해 먹는 초보 부랑자들의 서투르고 정성스러운 만찬이었다. 생각해보면 하루 종일 모든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그랬는지 마치 바라 왔던 것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너무 좋다를 연발했다. 그런데 너무 좋다고 할 때마다 너무 좋았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 거의 모든 밤이 불면인 난데 캠핑카 지붕 구석에 다락방처럼 마련된,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잠자리에서는 누가 언제 썼는지 모를 침낭을 덮고도 숙면을 했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자 바닷가에는 힘이 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애와 모자 달린 점퍼를 입고 고깃배들이 매어져 있는 부두 끝까지 서로 기대며 걸었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축축하고 차가운 바람을 실컷 맞고 돌아와 주전자에 물을 끓여 믹스커피를 마셨다. 마주 앉아 눈곱을 떼고 하품을 했다. 둘이서 처음 맞는 아침이었다.      


# 낮동안 바다를 등지고 달렸다. 달리는 대로 논밭뿐이었다. 아직 날이 따뜻해서 여름 색의 푸르른 벌판 위로 좁은 길들이 가르마처럼 지나고 있었다. 달리던 중에 세 길이 한 곳에서 만나는 세모난 땅 위에 차를 세워 차양을 내리고 의자와 탁자를 펼쳤다. 프라이팬에 구운 식빵과 계란 프라이와 인스턴트 수프를 먹었다. 아무 맛도 없는 것 같다면서 세 개를 먹었다.

가까이에 키 큰 나무를 줄지어 서있는 산책로가 있어서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그 길을 왔다 갔다 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 한참 떠들다가 발 앞을 휘리릭 가로지르는 초록 뱀을 밟을 뻔했다. 그럴 뻔한 거지 밟아 죽인 것도 아닌데 끔찍하고 슬퍼서 꽥꽥 울부짖었다. 언제나 나에게만 그런 일이 생긴다. 우리 둘 중에 내가 그 애보다 겁도 많고 착하게 살았는데. 억울하고 얄미웠다.   

  

#너는 책 읽고 있어. 나는 분리수거할게.라고 그 애가 말했다.

-같이하자.

-왜?

-그럼 빨리 끝낼 수 있잖아.

-빨리 끝나지 않아도 돼. 천천히 하자.

나는 잠시 생각하다 그래.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참 별거 아닌 말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그 순간이 가장 좋았을까.

구름도 햇살도 바람도 적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개미도 잡초들까지도 모두 평온했다.

나는 다리를 흔들면서 책을 천천히 읽고 그 애는 노래를 흥얼대며 천천히 분리수거를 했다.


# 한참 책을 보는 사이 그 애가 없어져서 둘러보니 멀리 키 큰 나무 아래에 쭈그려 앉아 뭘 하고 있다. 애처럼 벌레를 잡으며 노는 건가 궁금했지만 그냥 두었다. 얼마 있다 그가 깨끗하게 손질한 콜라 페트병을 불쑥 내밀었다. 노란 꽃과 강아지풀과 잡초가 어우러진,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꽃다발이었다. 벌레를 잡은 게 아니고 꽃꽂이를 했구나. 어느 쪽이든 천진하다. 나는 천진한 사람의 사랑스러운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너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했다.


# 두 번째이고 마지막이었던 밤에는 비가 내렸다. 캠핑카 천장에는 큰 창이 나 있어서 잠자리에 누운 채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를 볼 수 있었다. 농부의 자식이라 저녁잠이 많은 그는 저녁밥을 해 먹고 벌써 잠이 들었다. 여관집 딸이라 밤잠이 없는 나는 혼자 사과주 두병을 홀짝홀짝 다 마시고도  졸리지 않았다. 그 애의 옆에 누워 창에 부딪혔다 흩어지는 빗방울들을 꼼짝없이 바라보았다. 혼자 깨어있다는 것은 매일 밤과 같은데 쓸쓸하지 않은 것은 모든 밤과 달랐다. 아주 가까이 들리는 빗방울 소리 때문인지 그의 숨소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비 온다.

나는 혼자 말했는데 그 애가 답했다. 비와?

-추워.

한참 있다 또 중얼대니 그 애가 또 대답했다. 추워?

그 애는 머리를 베주던 팔을 접어 나를 가까이 당겨 안았다.

들여다보니 그는 여전히 깊게 잠들어있었다.

아침에 물어보니 그는 간밤의 대화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대답하는 잠꼬대였지만 나는 그의 무의식이 다정한 것이 좋았다.


# 내가 여행 중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내가 할게’였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같이 해’라고 대답했다. 캠핑은 생각보다 수고스러운 일이 많았다. 그래도 ‘내가 할게’를 만류하고 같이 하는 일은 싫지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너의 내가 할게 가 너무 좋아.’라고 말했다. 그는 언젠가 보았다는 인간극장 얘기를 꺼냈다. 아픈 노모를 차에 태워 유랑하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며 알뜰히 챙기는 효자 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신은 그런 심정이었다고 덧붙였다. 나는 낄낄대며 웃었다.

가끔 독한 비유를 아리송하게 하는 그였다. 막상 웃느라 지나고 나면 욕 아니었을까 흠칫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 여행은 비 내리는 월요일 아침에 끝이 났다. 캠핑카를 반납하고 그 애의 차로 집에 가는 길에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살림살이 나뒹구는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무엇인가를 두고 온 것만 같았다. 조용하고 유연하게 달리는 차 안에서 설렘이 울렁임으로 바뀔 만큼 오래 기다린 그 여행을 모두 보낸 것을 실감했다. 빗소리는 어젯밤과 같은데 나는 다시 쓸쓸해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여행에서 남은 햇반과 간식들을 혼자 일주일 동안 먹었다. 그것들을 다 먹을 때까지 여행의 순간들을 자주 떠올렸다.  

    

# 나중에 그 애가 말하기를 내가 나도 모르게 나긋한 존댓말을 쓰며 오래 운전하는 그 애를 격려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래도 눈치 빠르게 잡다한 일을 해치우기도 했단다. 까다로운 사람이라 걱정했는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씻고 잘 웃어서 놀랐다고도 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내가 최고의 여행 메이트였다고 덧붙였다.

그 애가 이야기하는 나는 나 같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고 알게 되었다. 안 하고 못하는 게 많은 나였지만 하고 싶으면 모두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여행을 다 좋고 괜찮은 것들로만 채우고 싶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걸 하다 보니 불만도 불평도 불면도 틈이 없었다. 그런데 좋은 것만 하고 싶게 만든 건 오로지 그 애였으므로, 그 애도 나의 최고의 여행 메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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