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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Apr 26. 2020

너의 체면이 되는 일

봄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겨울이다.
그러나 나는 숨겨진 봄의 냄새를 알아차린 것도 같다.
그런 날의 저녁이었다.

그 애는 운전을 하던 중에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나 어렸을 때 바둑을 배웠었거든’
나는 궁금한 눈으로 그 애 오른쪽 얼굴을 빤히 보았다.
‘바둑에는 돌의 체면이라는 말이 있어. 내가 놓은 수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 다음 수를 놓는 거야.’
그 애는 그렇게만 말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말을 생각했다. ‘놓은 돌의 체면을 지키는 일’에 고군분투하는 어린 그 애의 옆모습을 떠올렸다.
조그맣고 반질반질한 바둑알이 탁, 하고 두꺼운 나무 바둑판 위에 놓였다. 어린 그 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체면이 있는 돌이 근사하게 앉아있었다.
그 애가 오랜 시간 보여준 크든 작든 시작한 일에 의심하지 않는, 시작했으므로 끝까지 당연하게 책임지던 그 태도가 시작된 어떤 날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진짜 멋지다, 그 말.’
‘그치?’
멋진 말을 해낸 그가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차 안은 고요하고 밤의 거리는 빛났다. 어쩐지 그 순간만큼은 금세 다른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놓아 온 바둑돌들을 헤아려 보았다. 내버려 둔 지난 것들과 성급하게 시작된 새로운 것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 애와 내가 지키고 있는 것들을 떠올릴 때 그 애가 말했다.

‘너는 나라는 사람의 체면이야.’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 말이 내게로 천천히 오며 여러 번 울리는 것을 들었다. 그럼에도 그 말은 흩어지지 않고 곧장 나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닿아 쉽게 다시 꺼낼 수 없는 곳에 자리 잡았다.

그 애가 돌아가고 집으로 걸어 들어올 때 내 걸음에서 자주 나던 덜그럭 소리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나는 소중하고 분명한 것을 알게 된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것은 해야 할 것이 많은 사람의 걸음이었다. 나는 바빠질 것 같았다.
그가 많은 순간 스스로의 체면이자 나라는 사람을 위해 골몰해질 때 그 눈동자가 깊어질 때 나도 그럴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너의 체면의 되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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