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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Apr 24. 2020

나를 싣고 가는 것들

비가 내리는 일요일 저녁, 아이와 집 근처 카페에 와있다. 집을 나서자 마치 음침한 입김 안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비바람이 섞인 겨울 냄새는 차갑고 상쾌했다. 둘이서 각자의 우산을 쓰고 젖은 거리를 걸을 때 아이는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이는 부지런히 커서 이 겨울이 지나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아이는 숫자로 크고 키로 크고 태도와 마음으로 크고 말발로도 컸다. 지금도 나와 대학 동기처럼 나란히 앉아 각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그 애는 지금 십 넘는 수 더하기를 막 시작했는데, 조용하다가 이따금 낮은 한숨을 뱉는다.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아이의 고심하는 얼굴을 지나 카페 유리 너머로 예쁘게 반짝이는 빗길을 내다본다.

오늘이 이렇게 가고 내일이 오는 것과 그 내일이 너무 예상되는 것과 예상이 거의 다 맞는 나의 일상을 생각한다.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 벌써 일요일이라니 좀 당황스럽다. 요즘 시간이, 마치 도망가는 사람처럼 나를 밀치고 달린다. 시간이 나를 실어갈 때가 있고 외면하고 저 혼자 흘러가버리는 때가 있다. 시간의 등에 업히지 못하고 그걸 보고만 있는 요즘은, 나는 무엇에 실려 가고 있는가. 아니면 한 자리에 단지 멈춰 서있는가. 생각한다.     


나는 지금, 차마 서류는 정리하지 못한 부부 관계와 이제 매듭이 헐거워진 사람들과의 인연과 전에 비해서 좀 나을 뿐 여전히 어려운 육아와 많은 것 같지만 늘 부족한 양육비와 주 3일의 파트타임 일로 채워진 삶을 살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차례로 혹은 동시에 나를 흔들어대면, 그 뒤에도 오래 휘청이는 마음은 열심히 책을 읽고 단 몇 줄이라도 글을 쓰는 것으로 잡아보려 애쓴다.

그렇게 여진을 견디느라 분주한 나의 일상은 어쩌면 시간 대신에, 읽고 쓰는 수많은 문장들에 실려 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평생을 사람들 사이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살았고 그것이 좋았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로 주고받는 대화와 만남이 완전한 사랑과 우정, 동지애, 소속감 같은 것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전한 무엇은 없다는 것을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사람들 사이에서 잡을 수 없는 인연과 휘발되는 마음과 닿지 않는 진심, 반복되는 오해들은 어느 순간 견딜 수 없는 피로를 주었다. 나는 점차 사람들 가운데 깊은 곳에서 바깥쪽으로 밀려 나오고 있었다. 괜찮았다. 그저 이렇게 혼자가 된 김에 쉬어가고 싶어 졌다.


관계를 향한 힘과 의지는 떨어졌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과 필요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글로 채운다. 김영하의 도도하고 선명한 문장에서 엉킨 생각을 풀고  박연준의 산문집에서 동질의 쓸쓸함을 만나면 안심하고 나를 연민한다. 박완서의 글에서 당신의 지난 이야기로 나의 지금을 잊고, 정세랑의 글을 읽으며 수많은 타인의 가장 가까운 곁에 서본다. 또 이슬아의 모든 문장에서 자주 기운을 얻는다.     


사랑을 할 때도 보고 싶어 못 견디겠고 만나면 막 만지고 치대고 싶어 죽겠던 사람이 있고, 그저 옆에 앉아 같이 귤 까먹으며 텔레비전 보는 게 좋았던 사람이 있는 것처럼 독서도 그렇다. 어떤 책은 조심히 한 문장씩 떼다 주머니에 접어 넣는 마음으로 읽고, 어떤 책은 배고파 먹어치우는 것처럼 재빠르게 읽어나가고, 어떤 책은 열렬하게 어떤 책은 게으르게 읽는다.

책은 나에게 무수한 사람이며 그들의 목소리고, 글은 그들에게 하고 싶은 나의 대답이다.     


매일 밤 아홉 시가 되면 아이와 나란히 양치를 하고 온수 매트가 데워 놓은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아이는 만화책을 나는 아이패드 e북을 펼치고 엎드린다. 한참 읽다가 내가 너무 조용했나 싶어 괜히 아이를 꽉 껴안고 귀찮게 하면 오히려 그 애가 책 좀 보자며 딱 자르곤 해서 나는 우물쭈물 다시 보던 글로 돌아온다.

열 시가 넘으면 불을 끈다. 아이가 아기 때처럼 쌔끈한 숨소리를 낼 때까지 나는 어둠 위에 기억나는 문장들을 혹은 쓰고 싶은 문장들을 놓아본다. 모든 것이 어둠에 가려지고 오직 원하는 것만 보이는 유일한 시간이다.

아이가 매일 밤 고요한 그 시간을 함께해주어서 참 고맙다. 그 애는 크는 만큼 나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겨울은 든든한 문장들과 아이의 너그러움에 실려 지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2019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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