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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May 26. 2020

순간의 문장-1

#1
아침에 냉동실을 정리하다가 얼음조각에 손바닥을 길게 베었다.
, 하고 놀라 살펴보니 손바닥이 저도 놀란 것처럼 새하얗게 질렸고 반듯하게 베어진 살은 벌어져 있었다.
뒤늦게  보란 듯이 붉고 묽은 피가 벌어진 틈에 차오르더니 금세 방울을 맺는다.
  닦아내고 다시 상처를 바라보자  사이 상처는  다물어져 있다.
나는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들여다보니 베인 살은 서로  붙어 틈을 보이지 않는 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같다.
핏자국이 분명히 남아 있어서 완벽하게 사건을 감출  없는데도 말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내가 잘한다.
이를  물고, 보면서도 보지 않으며, 사람들을 따라 웃고, 눈치껏 적당한 대꾸를 하고, 혼자서도  갖춘 식사를 하고, 여러 권의 책을 번갈아 읽으며, 뜨거운 물에 오래 씻고,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당겨 눈을 닫은  잠이 드는, 어제와 다름이 조금도 없는 것처럼 구는 것은 내가 잘한다.
나는 핏자국도 남기지 않아 아무도, 아무도 모른다.



#2
어린이날이 었는지  생일날이 었는지 잊어버렸지만, 언제였다고 해도 그랬을만한 포근한 날이었다.
동생이 아프게 태어나자 나는 울산의 작은 이모집으로 보내졌는데, 그날은 엄마가 나를 보러 오기로 처음으로 약속한 날이었다.
어린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서 저녁과 함께 엄마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가슴이  뛰었다가 쪼그라들었다가 뜨거웠다가 서늘해지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위로 솟구쳐 오르는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했던 느낌은 지금도 남아있다.
이모네 집에는 이모부가 만든 평상이 놓인 옥상이 있었는데 거기에 앉으면 대문 밖까지 내려다볼  있었다.
나는 해가 서서히 멀어져 가는  같다고 생각되자마자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평상 위에 앉았다.
엄마가 며칠 전에 보내준, 눕히면 눈을 감고 일으키면 다시 반짝 뜨는 통통한 얼굴 위에 주근깨가 그려진 여자아이 인형을 안고 있었다.
나의 주위를 노을이 아주 붉게 번졌다가 사라지고 천천히 어둠이 내리나 싶더니 이내 아주 깜깜해질 때까지 엄마는 오지 않았다.
이모가 나를 찾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대답하지 못하고 가슴에  안은 인형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엄마가   없어 미리 선물을 보내온 것이라는  깨달았다.
어린 나는 눈물이 밖이 아니라 안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최초의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었다.



#3
엘리베이터에는 언제나 냄새가 남아있다.
비어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 거기에는 누군가의 흔적이 냄새로 아직 머물러 있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듯한 4 아저씨의 쿰쿰한 장롱 냄새, 시원하고 진한 향수를 쓰는 8 대학생 아들의 냄새, 꽃향기가 첨가된 샴푸인지 비누인지의 냄새는 피부가 고운 우리   아주머니 냄새, 오후 5 즈음에는 택배 아저씨의 깊은 땀냄새, 주말에는 시시때때로 피자와 치킨 냄새, 어떤 늦은 밤엔 방금 피운 담배 냄새, 운이 좋은 날엔 꼬마들의 달콤한 사탕 냄새.
오르거나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냄새의 주인에 대해 생각하고 이내 찾아낸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자신의 흔적을 떨군 것만 같다.
존재가 떠나고 남겨진 흔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수도, 그러기 전에 한번  반짝일 수도 있다.
내가 그들의 흔적을 발견할  있으므로 나의 그것도 누군가에게 발견되면 그렇게 잠깐 나는 다시 떠오르는 걸까.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에 누군가 올라타서 ‘, 7층의 내가 아는  사람이 방금 내렸나 보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상상해보니 우습고 멋쩍다.
때로는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고 어쩔  모두가 나를 알아주면 좋겠지만,  생각과는 상관없이 나의 흔적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방울처럼 반짝 잠시 떠올랐을지 모른다.


#4
 살의 아이는 높은 나무에 앉은 비둘기를 향해 소리쳤다.
비둘기야! 위험해! 어서 내려와!!’
  애는  나팔까지 만들어 점점  크고 다급한 소리로 비둘기를 다그치고 있었다.
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흐뭇했다.

아이는 어느 사이 여덟 살이 되었고 때때로 낯설 만큼 어른스러워졌다.
    애를 나의 사진첩과 일기장에서만 다시   있다는 사실에  나는 몰래 서운해지곤 했다.

아이는 산책을 하다 높은 나무에 앉은 비둘기를 발견하지만 이제는 그때처럼 소리치지 않았다.
그러나  애는 나무 아래에 꼼짝없이 서서 비둘기가 어딘가로 날아갈 때까지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애는 여전히 높은 곳의 비둘기를 몹시 염려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울인 그런 마음은 가끔 시간도 관여할  없다는 것을, 나는  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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