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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May 29. 2020

순간의 문장-2

#1
나는 어렸을 때 식탐이 많아 간식을 친구에게 뺏길 바에는 바지에 오줌을 싸던 극성스러운 꼬마였다.
사춘기가 되자 현관에서 교복 치마를 말아 올리며 엄마가 입에 넣어주는 밥을 겨우 받아먹고 학교에가는 철부지가 되었고, 나중에는 뭐에 마음이라도 상하면 며칠씩 이불을 뒤집어쓰고 ‘밥 안 먹어’ 유세를 부리던 시절도 있었다.
다 커서 혼자 살 때는 엄마가 매일 전화해  ‘밥은 먹었니, 뭘 먹었니, 라면 말고 밥 해 먹으랬지, 밥심이 있어야 뭐라도 한다니까, 밥이 최고야’ 그놈의 밥타령을 지치지도 않고 할 때마다 ‘배 안 고파, 커피 마셨어, 아 지금이 625야?’ 라며 빽빽거리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입 짧은 아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한입만 더 먹으라 읍소를 하고, 정작 나는 바빠서 배고픈 줄도 모르다가 늦은 밤 싱크대에 서서 얼른 밥 한 공기를 마시듯 해서 배를 채우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 말이 맞았다. 진짜로 밥심이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고  밥 안 먹으면 내 손해였다.
나는 이불속으로 숨을 수도 없고 훌쩍 여행을 떠날 수도 없는, 제자리를 매일 꼭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무처럼 자리를 지키는 일도 실은 나아가는 일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밤새 안개 같은 한숨으로 방 안을 채웠어도 아침이 되면 아이의 아침밥을 짓는 일, 그 애한테 많이 웃어 주는 일, 눈빛과 목소리로 집안을 밝히는 일, 그제와 어제와 같은 평온한 하루를 또 한 번 만들어 내는 일 모두 밥심 없이는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나에게도 이렇게 밥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절이 온다는 것을.



#2
고양이는 새벽이 되면 어디선가 나타나 무심한 얼굴로 느리게, 나에게 걸어온다.
나는 동물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매일 밤 그 애가 거실을 가로질러 내게 곧장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반가워 웃음이 난다.
그 애가 나에게서 적당한 거리(가령 소파 한자리 건너)를 두고 앞 발을 착 모아 앉으면 비로소 우리의 새벽은 시작된 것이다.
나의 시간은 남들보다 세 시간쯤 느려서 자정이 훌쩍 지나야 겨우 편안한 밤이 온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영화나 책을 보고 어쩔 땐 정말 돌처럼 가만히 있기도 하다가 가장 깊은 새벽이 오면 각자 잠자리에 든다.
어제는 내가 할머니에 대한 소설을 읽다가 별안간 애처럼 줄줄 울었다.
고양이의 파아란 눈이 훌쩍이는 나를 빠안히 본다.
한낮의 나였다면 같은 글을 본다고 한들 울지 못했을 테니까 그 애는 분명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뭐든 약간 느린 사람은 언제나 조금 외롭기 마련’이라고 어제 그 애한테 하지 못한 변명을 여기에 적어본다.



#3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다.
어떤 사람의 손을 잡는다.
그것은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둘이서 바람 부는 강가를, 거대한 수풀을, 뜨거운 모래밭을 오랜 시간 걷게 될 거라는 이야기다.
그러는 동안 서로만 아는 무수한 이야기가 생겨나고 기억된다.
그리고 어디쯤에 서면 반드시 잡은 손을 놓아야 할 때가 온다.
다정하거나 거칠거나 서툴거나 부드럽거나 자꾸 놓치거나 또는 힘이 셌던, 어떤 손들과도 그래야 한다.
나는 지난 모든 손과 작별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했어야 했다.
같이 지나온 모든 길이 좋았다고, 내가 먼저 아주 천천히 인사할 걸 그랬다.



#4
오랫동안 청소하는 사람이 있다.
많은 일 앞에서 언제나 숙고의 결정을 했지만 대부분의 일이 성공과 완성이 아닌 실패나 포기로 끝이 났다.
그 흔적들은 알맹이가 사라진 껍데기와 초라한 쓰레기로 남아 내 안의 어딘가에 쌓여 갔다.
그것들을 치우느라 어깨를 오므리고 고개를 묻은 채 느리게 비질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나다.
모두 내가 만들어 낸 일인데도 마치 남의 일을 떠맡은 것처럼 억울하고 화가 치밀다가 참회의 순간처럼 숙연하다가 관조하듯 고요한 마음이 되었다가 그러면서도 비질을 멈추지 않는다.
청소를 모두 마치면 한쪽에 걸터앉아 여전히 고개를 수구린 채 숨을 고른다.
한참 뒤에 시간과 내가 그대로 굳어버렸나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아주 멀리서 소란스럽고 들뜬 시작의 기운을 느낀다.
나는 고단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소란스러움이 조금씩 가까워 올 수록 마음이 들썩인다.
저 무엇인가의 시작이 나에게 온다면 설령 그 끝이 다시 잔해를 청소하는 일이라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지친 몸과는 상관없이 솟아나고 있다.
실패와 포기 뒤의 밤은 깊고 길었으나 그 끝은 언제나 또 한 번의 아침과 이어져있었다.




#5
엄마는 어려서 글짓기를 잘했단다.
한 번은 도대회에서도 장원을 한 적이 있는데, 엄마의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새엄마에게 구박받는 조카가 가여웠던 엄마의 이모가 찾아와 장에 가서 새 신을 사주었던 일을 썼다고 했다.
글이 당선되자 담임 선생님은 너무 기뻐 엄마를 업은 채 춤추듯 운동장을 돌았다고 했다.
엄마는 이 대목을 얘기할 때마다 코끝이 빨개졌고, 나는 꼭 내가 덩실대는 등에 업힌 것처럼 어지럽고 행복했다.
‘뭔가 자동으로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어버이 날이에요’로 시작되어 놀랍고 사랑스러운 문장들로 채워진 어린 딸의 감사 카드를 열어보며 나는 엄마를 떠올렸다.
치마저고리에 새 고무신을 신고 몽당연필을 쥐고 글을 짓던 어린 엄마는 자라서 나를 낳았고 나는 또 자라서 아이를 낳았다.
엄마는 나에게 비슷한 얼굴과 무르고 예민한 성격과 함께 글쓰기를 좋아하는 마음도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다시 쪼개 내 아이에게 나누어 주었나 보다.
이제 엄마는 더 이상 아무것도 쓰지 않지만 가끔 내 아이가 쓴 문장들을 가만히 오래 들여다본다.
거기에 흐르는 엄마로부터 시작된 무엇을, 엄마는 느끼고 있는 것일까.
성도 다르고 세대도 다른 세 여자는 그렇게 깊숙한 곳에서 서로에게 이어지는 물줄기 하나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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