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ro Jan 15. 2022

밥 먹는 사이

너는 대체로 심드렁하고 나른한 얼굴이다. 먼저 도착해 앉아 있다가 문으로 들어서는 나를 분명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너는 매번 그러니까 그럴 줄 알았어도 나는 잠깐 민망하고 서운한 사람이 된다. 너는 다른 것들과 함께 반가움의 표현도 모르는 것 같다고 나는 또 한 번 생각한다.


너는 밥도 빨리 먹고 커피도 빨리 마신다. 너의 속도를 쫓다 보니 먹는 것에만 열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너는 그러는 동안에도 자주 전화가 오고 시계도 자주 들여다본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요란한 벨소리는 언제나 나를 점점 조급하게 만든다.


너에게 '밥 먹자'라는 메시지가 오면 우리는 만나서 밥을 먹는다. 그날은 안돼,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거의 매일 아무 일도 없기 때문이다. 네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잠시 답을 망설이는 동안에도 나는 만나고 싶은 마음과 피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알기는 오래 알았어도 친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사이였다. 타고난 성향과 성격이 반대라는 걸 진작에 알아채고 둘 중 누구도 가까이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가끔 얼굴이나 보는 일 말고는 십 년이 넘도록 따로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내가 십 년 동안 서울 변두리에서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치르며 은둔자에 가까워졌을 때, 집이 가깝고, 평일 낮시간이 비교적 여유롭다는 서로의 비슷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건 흔치 않은 조건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끔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마주 앉아 밥을 먹는데, 진짜로 밥만 먹을 수는 없으니 종종 대화를 했고, 말은 서로 간에 몰라도 되는 것까지 알게 하였다. 나는 네가 오래전에 알던 것과 다른 것에 놀라고,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건 놀라지 않는다. 나와 기질도 생각의 방향도 잘 맞지 않는 것은 예상대로 였지만 그래도 간혹 말이 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간혹의 간혹, 둘이서 배꼽을 잡고 웃게 되는 일도 있었다. 그런 일들이 모여 우리는 십 년 동안 될 수 없었던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무슨 얘기든 잘 거르지 못하고 하는 나와  그러는 경우가 거의 없는 너의 이야기의 질과 양에서 큰 차이가 있다. 너는 주로 내가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마치 뉴스를 틀어놓은 것처럼 잠자코 있으면 되었다. 가끔 오지랖을 부려 네 말에 내 의견을 붙이려 하면 너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이미 결정했고 너에게 혼란이나 망설임은 없다. 너는 내 의견에 모조리 반박할 수 있고 가끔은 내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게끔 짧은 설교를 한다. 나는 고개를 소심하게 주억거린다. 내가 입을 열었던 것은 정말로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너에게 나의 자리를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너는 속 얘기를 안 하는 만큼 남의 속에도 도통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내 얘기에 대한 반응도 늘 미지근했다. 이를테면, '나 어제 영화 봤어.' 하면' 아, 응- '하는 식이었다. 나는 여기서 더 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다가, '생각보다 재미있더라.'라고 덧붙이고, 너는 ‘아, 그래?’ 그러고는 먹던 것을 마저 먹거나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질문을 기다렸다. 말 끝에 물음표를 붙여주는 것 말이다. '무슨 영화?' 라던가, '누구랑? '이라던가.

질문은 이기적인 조직인 뇌가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사고를 넓혀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다른 이를 자신의 세계에 편입시킬 수 있도록 정보를 모으는 작업인 것이다. 호기심이나 관심, 혹은 애정이 없다면 할 수 없고 있다면 참지 못하는 것이 질문이다. 나는 관심받지 못하는 친구가 되어 잠시 침울하다. 이내 생각한다. 참 너도 너고 나도 나다.


너는 참 효율적인 사람이라서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듯 보인다. 객관적인 문제 해결에도 몹시 능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너의 효율성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은데,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그런 식으로 풀리지 않거나 그런 식으로 풀고 싶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말들로 해결 방법을 모색해주던 너는 내가 좀 답답한 모양인 듯 간간이 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네가 가장 말을 많이 하는 때는 그런 때이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기꺼이 멍석을 내어준다. 나에게는 너의 자리가 있다.


나는 좀처럼 기운이 없고 뿌연 안갯속에 갇히기 일쑤다. 너는 가끔 그런 나를 깨워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중 반은 정말로 너의 말에서 무언가 깨닫게 되는 일이고 반은 네가 나를 패배자로 만들까 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는 일이다. 너는 언제나 악의가 없다. 그러나 네가 긴 조언 끝에 무언가 포기한 듯이, 너 그건 그냥 타고난 거야. 안 변할 거야.라는 말을 읊조리고 밥을 (그놈의 밥) 먹고 있는 것을 보자면 가슴과 눈에서 파밧 하고 불이 붙는 것 같다.


너는 똑똑한 사람이라서 이제는 나를 잘 알지만, 어떤 공백과 어두운 곳은 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너와 꾸준히 밥을 먹었고, 계절은 몇 바퀴를 돌고, 나이는 계절 네 개에 하나씩 차곡차곡 더해졌다. 나는 네가 배부르게 먹고 나른한 얼굴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아왔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맛있었어, 즐거웠어, 반가웠어. 그 말들은 모두 진짜가 아니었지만 모두 거짓도 아니었다.


나는 너를 닮고 싶어 네가 좋은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자기 최면과, 할 만큼 다 하고는 떳떳하게 가슴을 펴는 몸짓, 쟤는 어쩐지 다 알 것 같아,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함부로 동요하지 않는 눈 같은 것. 한정된 마음을 모두 꺼내 남에게 쓰지 않고 나에게 쓰고 남은 만큼만 남에게 건네는 것. 나는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몸이 나이 들며 미세하게 잃는 기능처럼 마음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나에게 마음 쓰는 법을 나는 배우지 못했다. 너는 어디에선가 그것을 배워 알뜰하게 자신을 지키고 돌본다. 어떤 풍문이나 오해 앞에서도, 상처 주는 말과 얼굴들을 만나도 마음 쓰지 않는다. 너는 이기적이고 얄팍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나는 너를 닮고 싶다.


나는 이유가 있으나, 네가 나와  밥을 먹는 이유는 이따금 궁금하다. 나는 너에게 있어서 다소 피곤하고 귀찮으며 말과 사건 사고가 고루 많은 친구이니 그렇다. 그러나 너를 떠올려보니 거기에는 아무 이유가 없을 것이 분명하다. 단지 내가 여기에 있을 뿐. 배는 먹은 뒤 고파지고 먹은 뒤 고파졌을 뿐. 아무 이유 없이 자연스럽다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느냐고 너는 반문할 것이다. 당연한 듯 집으로 찾아들어가는 것처럼 같이 밥을 먹는 사이보다 설명이 더 필요한 사람이 있겠느냐고 너는 말할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이번엔 정말로 맞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너는 아무 표정도 보이지 않고 다시 밥을 먹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목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