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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ro Jan 24. 2022

본 것이 남아 있어서,

크리스마스이브였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나도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날도 아닌, 그저 흐린 겨울날이다.

먼지 같은 눈발이 잔잔히 날린다.

소리도 없이 떨어진 눈송이들이 점점이 살았다가 녹아버린 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간다.

산책로로 이어진 모퉁이에서 십 대 아이들 여럿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아이 둘이 이내 무리에서 한걸음쯤 뒤처져 걷는다.

나는 길을 내주고 둘의 뒤를 가깝게 따라가고 있다. 얼른 앞질러야지 생각하는 찰나,

아이 하나가 다른 아이의 팔을 아주 살짝 잡아당기는 것을 나는 보았다.

두꺼운 점퍼를 꼬집는 것처럼 너무 살짝이라 알아차렸을까 싶었는데

아이는 옷을 잡아당긴 키 큰 아이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그러자 큰 아이의 주머니에서 숨어 있던 손이 나온다. 손에는 작은 꾸러미가 들려있다. 초콜릿과 사탕 같은 알록달록 한 것들을 한 주먹 담긴 투명한 비닐봉지가 빨간 리본으로 묶여 있다.

두 아이는 잠시 모든 것을 멈춘다.


뭐야? 이걸 왜 줘?라고 아이가 묻는다. 말소리는 작고 말끝은 어쩐지 부드럽다. 아이의 말을 글자로 쓰려면 물결 모양을 꼬리처럼 달아야 할 것 같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아이들을 지나쳐간다.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몰랐으면 좋겠어서 그랬지만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 애들은 나를 보지 못할 것 같다. 어쩌면 그 순간에 두 사람의 주위가 삽시에 고요해졌는지도, 마주 보는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사라지는 눈송이만 커다랗게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둘 말고는 모든 것이 잠시 숨죽였던 순간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선물을 건넨 아이의 얼굴이 더운 것처럼 붉다.


나는 이제 더욱 촘촘한 무늬로 바닥을 채우는 흰 눈을 밟고 걸으면서,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애쓴다.

얼굴이 붉어진 아이는 이걸 왜 주는지 묻는 뻔한 질문에 뻔하고 다정한 대답을 내놓았을까. 아니면 이윽고 둘은 꿈에서 깨듯 깨어나 아무 말도 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을까. 그래도 결국 다른 주머니로 옮겨진 꾸러미에 아이 손이 닿으면, 그것이 고백이라는 것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눈이 내려 참 좋다. 그저 지나간 내가 생각한다. 


그날은 속눈썹보다도 가벼운 눈이 날리고,

햇살 한 뼘 없이 흐리지만 춥지는 않은 그런 겨울날,

해 넘어까지 기억하게 되는 두 사람의 한 장면을 보았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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