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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Sep 03. 2024

두 번째 편지, 내가 잠든 동안.

더 이상 편지를 읽을 수 없는 K에게.

K에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마에게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찍혀 있었어. 짜증이 치밀었어. 한동안 안 그러다가 갑자기 왜 이러지, 싶었거든. 고민하다 마지못해 전화를 걸었더니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려왔어. 할머니가 자는 동안 돌아가셨다. 얼른 내려와.

 

  엄마는 할머니가 아주 오래 살 줄 알았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지. 할머니는 무려 아흔 살이 넘으셨는데도, 바보같이.


  장례식장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었어. 두어 달 전, 할머니가 허리 수술을 받고 나서 한 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는 일어나서 보행 보조기를 붙잡고 열심히 걸어 다니셨다고 했지. 사촌 오빠는 이미 할머니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보였다고, 그래서 혹시나 자신이 해외 출장을 간 동안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고 말했어. 또 사촌 언니는 설날에 내려갔을 때, 생전 먹고 싶은 음식을 따로 말씀하시지 않던 할머니가 그날 따라먹고 싶은 음식을 여러 개 말씀하셨다고 했지.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어. 노인들은 자신이 떠나는 시점을 안다던 그 말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할머니는 어땠을까. 아마 무서웠겠지. 생전 할머니는 참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서울에 올라온 뒤로 할머니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여겼으니까. 온 가족을 죽은 사람 취급해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 해도, 내가 별반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아서 더 마음이 괴로웠어. 이 말을 네가 들었다면 무어라 말해줬을까.

 

  돌아가시고 한 달쯤 뒤, 할머니 댁에 놀러 가는 꿈을 꿨어. 안방에 들어가니 할머니는 평소 자주 입던 보라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어. 집도, 옷도, 할머니의 모습도 똑같아서 나는 꿈인 줄도 모르고 ‘아, 우리 할머니 안 돌아가셨구나. 내가 착각했나 보다.’라고 생각했어. 나는 할머니를 불렀고, ‘할머니, 미안해.’ 하고 말하자 할머니는 떨떠름해하며 고개를 돌렸지. 애가 탄 내가 다시 ‘할머니, 사랑해.’ 하고 부르니 할머니는 내 쪽으로 웃으며 돌아봤고, 나는 그때 꿈에서 깼어. 그 뒤로 할머니는 내 꿈에서 영화배우였다가 요리사였다가 다시 할머니가 되기도 한다.

 

  할머니는 그래도 한 달 만에 꿈에 찾아와 준 반면 너는 아직 단 한 번도 내 꿈에 나타난 적이 없어. 이쯤 되면 꿈은 그저 무의식의 반영일 뿐이라는 말을 믿어야 할까.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지. 정말 죽으면 그때는 다시 다 만날 수 있나. 종교는 없지만 이제 나도 내세를 믿어봐야 하나.

 

  가끔은 네가 살아있던 시절이 꿈같아. 오로지 나만 기억하고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꿈과 다를 바가 없어. 악몽이다.

 

  요즘 나는 내 인생에 겨우 너 하나 없음으로 인해 생겨날 수많은 나쁨에 대해서 가늠해 보곤 해.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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