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편지를 읽을 수 없는 K에게.
K에게.
시간이 흐른다는 건 웃긴 일이야. 얼마 전 서랍 정리를 하다 친구들이 써 준 옛 편지들을 발견했어. 가족보다 네가 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한다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친하게 지내자는 문장을 보곤 웃어 버렸어. 그 편지를 받고 정확히 두 달 뒤 그 친구와 절연했거든. 사람들은 쉽게 착각해. 연애하는 것과 달리 친구 관계는 별 다른 노력 없이도 영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실은 그렇지 않은데.
시간이 흐르는 게 웃긴 일이라고 실감한 건 편지 때문만은 아냐.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총 일곱 번의 이사를 다니고, 다섯 개의 직장을 다녔어. 처음에는 어디 한 곳에 정착한다는 게 왠지 모르게 숨 막히게 느껴졌어. 그래서 계속해서 옮겨 다니길 반복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귀찮다. 지쳤어. 시간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어.
며칠 전엔 회사 옆 자리에 계약직 사원 분이 새로 오셨어. 00년생이라는데, 벌써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랑 같이 일을 한다는 게 신기해. 첫 회사에 다닐 때 나를 두고 90년대 생이냐며 놀라던 상사들이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싶어. 그때 내가 처음 일한 곳은 공기업이었는데, 체험형 인턴으로 들어간 자리였어. 체험형 인턴이 다 그렇듯 영양가 있는 업무를 하지는 못했지. 말 그대로 잡무를 했어. 그때 그때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정직원들은 나를 불러 일을 시키곤 했는데, 딱 한 사람 때문에 출근하기가 너무 싫었어. 차장은 본인 기분이 나쁜 날이면 별 꼬투리를 다 잡아 지적했거든. 그중에서도 가장 싫었던 건 나를 이름 대신 ‘친구야.’라고 불렀던 일이야. 언제 나를 친구야, 하고 부를지 몰라서 늘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나.
그래도 좋은 사람들도 많았어. 과장님은 내가 유독 심하게 혼난 날이면 괜히 내 자리에 와 주변 직원들에게 내 칭찬을 늘어놓고 가곤 하셨지. 사실 이젠 너무 오래돼서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대부분 휘발되었지만, 그분의 몇몇 행동은 아직도 선명해. 점심을 먹은 뒤 혼자 있는 나를 보고 같이 산책을 가자고 하셨던 것. 어느 날엔 점심시간에 같이 차를 타고 양산까지 가서 분식을 먹고 돌아왔던 것. 구내식당에 요구르트나 요플레가 나오는 날엔 늘 내 주머니에 넣어주셨던 것. 더 많은 일들이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 나는 그런 일들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계약이 종료되던 날 많이 울었어. 차장 때문은 아니었어. 오히려 과장님 때문이었지. 떠날 걸 알면서도 한결 같이 잘해주는 태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아서. 나는 그런 마음을 가족에게서도 받지 못했으니까.
시간이 흐른다는 건 웃긴 일이야. 네가 내 생일날 준 편지를 발견했어. 성인이 되면 같이 서울에 살면 좋겠다고,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적혀있었지. 우리는 그 시간들을 잘 버텨냈지만 이제 서울에 너는 없다. 갑자기 살던 집을 떠나게 되고, 일자리를 잃고, 영원할 것 같던 인연이 깨지기도 하듯 갑자기 사람이 죽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