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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Sep 05. 2024

세 번째 편지, 시간이 흐른다는 것.

더 이상 편지를 읽을 수 없는 K에게.

K에게.

 

  시간이 흐른다는  웃긴 일이야. 얼마  서랍 정리를 하다 친구들이    편지들을 발견했어. 가족보다 네가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한다고, 할머니가  때까지 친하게 지내자는 문장을 보곤 웃어 버렸어.  편지를 받고 정확히     친구와 절연했거든. 사람들은 쉽게 착각해. 연애하는 것과 달리 친구 관계는  다른 노력 없이도 영원할  있을 거라 생각하지. 실은 그렇지 않은데.

 

  시간이 흐르는 게 웃긴 일이라고 실감한 건 편지 때문만은 아냐.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총 일곱 번의 이사를 다니고, 다섯 개의 직장을 다녔어. 처음에는 어디 한 곳에 정착한다는 게 왠지 모르게 숨 막히게 느껴졌어. 그래서 계속해서 옮겨 다니길 반복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귀찮다. 지쳤어. 시간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어.

 

  며칠 전엔 회사 옆 자리에 계약직 사원 분이 새로 오셨어. 00년생이라는데, 벌써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랑 같이 일을 한다는 게 신기해. 첫 회사에 다닐 때 나를 두고 90년대 생이냐며 놀라던 상사들이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싶어. 그때 내가 처음 일한 곳은 공기업이었는데, 체험형 인턴으로 들어간 자리였어. 체험형 인턴이 다 그렇듯 영양가 있는 업무를 하지는 못했지. 말 그대로 잡무를 했어. 그때 그때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정직원들은 나를 불러 일을 시키곤 했는데, 딱 한 사람 때문에 출근하기가 너무 싫었어. 차장은 본인 기분이 나쁜 날이면 별 꼬투리를 다 잡아 지적했거든. 그중에서도 가장 싫었던 건 나를 이름 대신 ‘친구야.’라고 불렀던 일이야. 언제 나를 친구야, 하고 부를지 몰라서 늘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나.


  그래도 좋은 사람들도 많았어. 과장님은 내가 유독 심하게 혼난 날이면 괜히 내 자리에 와 주변 직원들에게 내 칭찬을 늘어놓고 가곤 하셨지. 사실 이젠 너무 오래돼서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대부분 휘발되었지만, 그분의 몇몇 행동은 아직도 선명해. 점심을 먹은 뒤 혼자 있는 나를 보고 같이 산책을 가자고 하셨던 것. 어느 날엔 점심시간에 같이 차를 타고 양산까지 가서 분식을 먹고 돌아왔던 것. 구내식당에 요구르트나 요플레가 나오는 날엔 늘 내 주머니에 넣어주셨던 것. 더 많은 일들이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 나는 그런 일들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계약이 종료되던 날 많이 울었어. 차장 때문은 아니었어. 오히려 과장님 때문이었지. 떠날 걸 알면서도 한결 같이 잘해주는 태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아서. 나는 그런 마음을 가족에게서도 받지 못했으니까.

 

  시간이 흐른다는 건 웃긴 일이야. 네가 내 생일날 준 편지를 발견했어. 성인이 되면 같이 서울에 살면 좋겠다고,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적혀있었지. 우리는 그 시간들을 잘 버텨냈지만 이제 서울에 너는 없다. 갑자기 살던 집을 떠나게 되고, 일자리를 잃고, 영원할 것 같던 인연이 깨지기도 하듯 갑자기 사람이 죽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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