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편지를 읽을 수 없는 K에게.
K에게.
요즘 너는 어떻게 지내. 답장이 너무 늦어버렸다. 미안하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열심히 살고 싶다가도 아무렇게나 살고 싶어 지기를 반복하는 요즘이야. 맛있고 몸에 나쁜 음식이나 먹으며 배를 채우고 싶다. 이 나이가 되도록 배운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라곤 폭식이나 몸에 그림을 새겨 넣는 일 밖에 없어. 웃기지?
난 최근 들어 유튜브로 옛날 예능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누워서 몇 시간이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했던 방송을 볼 수 있는 세상이야. <안녕하세요>라는 방송 기억나? 일반인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고민을 털어놓던 예능 프로. 뻔하고 또 너무 뻔해서 답답한 사연들이 즐비하던. 나는 이 프로를 볼 때면 네 친구 B가 생각나. 벌써 칠 년 전인가,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던 걔. 술에 취해 뜬금없이 <안녕하세요>에 나가는 것이 자기 소원이라 했지. ‘그런 철 지난 방송에 왜 나가고 싶냐, 어차피 반은 작가가 지어낸 조작이다.’라는 우리의 말에 B는 한참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어. 꼭 엄마와 함께 나가서 패널과 방청객의 반응을 통해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다고. 그와 동시에 엄마가 틀렸다는 걸 확인시켜주고 싶다고 했지. 그 프로를 보며 병원 내지 법원에 가야 할 사연을 가지고 대체 왜 예능에 나오는 걸까,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어. B는 결국 안녕하세요에 나갔던가.
그날 밤, 나는 집에 와서 B의 말을 곱씹었어. 그리고 침대에 누워 상상했지. 내가 그 방송에 나간다면 어떤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저는 어릴 때부터 일기 쓰는 걸 참 좋아했는데요. 학교에 제출하는 일기장, 친구와 함께 쓰는 비밀 일기장, 버디버디와 싸이월드 다이어리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써왔습니다. 그리고 저희 엄마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제가 쓰는 활자란 활자는 모두 다 읽어봤지요. 엄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서랍장에, 책장 속 위인전들 사이에 숨겨놔도 엄마는 집요하게 찾아보곤 했어요. 그것도 모자라 엄마는 제가 자주 쓰는 이메일의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해 친구들과 주고받은 이메일, 휴대폰 문자 메시지함까지 모두 살펴봤어요.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 있으면 ‘얘랑은 놀지 마라.’, ‘이런 이야기는 쓰면 선생님이 속으로 흉본다.’고 이야기하곤 했어요. 제 모든 일상의 순간에 엄마가 함께 했던 셈이죠. 한 번은 엄마에게 혼이 나고 화가 나서 엄마에 대한 욕을 쓰고 잤다가, 어떻게 자식이 돼서 이런 말을 쓸 수 있냐며 일기장을 다 찢어놓은 적도 있어요. 안 숨겼냐고요? 당연히 꽁꽁 숨겼죠. 말씀드렸잖아요. 엄마는 모두 집요하게 찾아서 보곤 했다고. 저는 그래서 지금까지도 일기를 못 써요. 가끔은 애인한테 메시지를 할 때도 이런 말을 해도 되나 혼자 검열하곤 해요. 성인이 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 혼자 산 지 자그마치 사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엄마가 몰래 집에 나타나 내 일기를 볼 것 같아서.
어색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서 더듬더듬 말하는 내 모습은 상상이 가는데, 이상하게 방청객 사이에 앉아있는 엄마의 얼굴은 짐작조차 가질 않아. 대신 엄마 옆엔 네가 앉아있을 것만 같았어. 묵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때로는 MC들이 하는 짓궂은 질문엔 내 편을 들어주면서. 전부를 드러내도 네가 그 자리에 있어줄 것이란 믿음이, 얼마나 안심되는 일이었는지 너는 알까.
너무 내 이야기만 했다. 이기적인 말이지만 어차피 너는 답장을 할 수 없잖아. 요즘 서울은 징그럽게 덥단 말로도 부족할 만큼 더워. 네가 있는 곳은 차라리 추웠으면 좋겠다. 이제는 딱 이 정도의 마음만이 남아있어. 그곳에서는 네가 너무 덥지 않기를, 고단하지 않기를. 너는 언제나 땀이 많아 여름 나기를 힘들어했으니까.
나는 앞으로 보고 싶다는 말을 영영 볼 수 없는 상대에겐 쓰지 않기로 했어. 무의미하잖아. 그래서 보고 싶다는 말 대신 앞으로 자주 편지하겠다는 말을 남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