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늬바람 Jul 16. 2020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 서평

희미하지만 용기있는, 쉼없는 선택을 응원하며 


1. 

한편 나의 이념은 타인에게도 투사되었다. 학교에 있을 때면 날 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나를 싫어하는 것처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의 무표정은 표정 없음을 넘어 적대적이었다. 이를테면 내게 출석부를 건네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학생의 얼굴은 굳어있었고, 내가 출석부를 건네기 위해 뒤를 돌아봐도 같은 얼굴을 만났다. 그런 사소한 일들에도 나는 상처를 받았다. 나는 더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의 눈빛 하나, 몸짓 하나에 지나친 신경을 쓰며 누구에게도 밉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 229쪽)      


소설의 주인공 희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일지언정 안에서는 생각의 물이 끊이지 않고 샘솟는 사람, 종종 그 물이 범람해버리기까지 하는 사람이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또는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우면서도 생각을 쉬지 않는다. 그래서 이토록 타인의 작은 몸짓에도 쉬지 않고 반응했다.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자신을 가두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완벽하게 갇히기보다는 조금씩 열어보고자 주어진 끈을 놓지 않았다. 만약 당신 역시 그 언젠가 출석부를 건네는 타인의 무표정에 자신을 지키려는 감각이 온몸에 꼿꼿해진 경험이 있다면, 어쩌면 이 소설은 당신의 그 날 선 감각을 조금 보듬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은 스물한 살이 된 독고희의 자전적 소설이다. 희의 최초의 기억은 밤중에 술 냄새가 나는 엄마가 자신의 얼굴에 구토를 한 사건이다. 어딘가 어긋나 버린 엄마라는 존재와 그 관계로부터 외로워하다 처음으로 마음을 열 수 있었던 친구 주호를 피아노 학원에서 만나게 된다. 어쩌면 작은 실수일 수도 있는 사건으로 인해 둘은 멀어지게 된다. 몇년 뒤, 희는 주호와 다시 만나 주호의 친구 소연과 함께 관계를 만들어간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과 선택이 이어져 만들어진 삶의 이야기. 그래서 사뭇 다르지만 결국엔 공감하게 되는 이야기, 희의 선택을 나지막이 응원하게 되는 이야기다. 제대로 피아노를 배운 적은 없지만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주호와, 멈추고 싶은 피아노를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견뎌내는 소연과, 쇼팽의 연주를 자신만의 방식과 사유로 듣고 해석하는 희로 인해, 소설에 쇼팽과 피아노 연주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하영 지음  / 봄들 출판사 

2. 

외출이 잦지 않은 엄마가 희를 데리고 처음으로 간 피아노 리사이틀은 ‘쇼팽’을 연구한 피아니스트의 공연이었다. 기대가 높은 엄마와는 달리 희는 기침 하나 제 맘대로 할 수 없는 공연장의 엄격한 분위기가 생경했다. 거기다 희 앞에 앉아있던 남자가 한번 기침을 시작하더니 결국 멈추지 못하고 공연장을 떠나버렸다. 순간 희는 그 남자가 자살했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연주되었던 곡은 쇼팽의 녹턴 Op.48 No.1 다단조, 희에게 쇼팽은 그렇게 처음으로 각인되었다. 몇 년 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후, 희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따라갔는데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니던 주호의 연주였다. 쇼팽의 녹턴 Op.9 No.2. 희와 주호가 만났을 때의 곡이다.      


쇼팽의 곡은 제목이 없고 번호가 있다. 희는 연주곡을 들으며 제목을 지어보거나 곡의 장면을 그려보기도 했다. 제목이 없어 곡 해석을 힘들어하는 주호의 옆을 지키기도 하며 슬며시 자신의 힌트를 내밀어 보기도 한다. 쇼팽의 곡은 희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도 했고 주호와의 관계를 끈끈히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한동안 서로 만나지 않다 뜻밖의 재회가 이루어진 곳에서도 쇼팽의 연주곡은 늘 등장한다. 새로운 해석이 더해진 연주와 함께.  


이렇다 보니, 독자는 쇼팽의 곡을 직접 듣지 않을 수 없다. 적극적 독서가 행해지는 순간이다. 읽던 책을 잠시 멈추고, 작가가 쏟아내는 클래식 음악의 지식과 정보에서 잠시 벗어나,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시공간으로 이동한다. 어떤 피아니스트의 곡을 듣던 그건 독자의 마음이다. ‘점점 느리게’가 얼마나 느려져야 하는지 ‘빠르게’가 어떻게 속도를 내면 좋을지, 서로 다른 이들이 책에서 만나 각자의 해석에 빈 공간을 채워 본다.      


음악의 해석이란 진실을 제조하는 일이었다. 나는 수많은 진실들 중 내가 무엇을 특별히 선호하는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이 곡의 알맞은 제목 또한 찾지 못했다. 이런 경우 제목을 짓는 일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부당하기까지 했다. (위의 책, 208쪽)      


3.  

액자 속의 회화와 달리 음악은 한꺼번에 전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음악은 한 음에서 다음 음으로 흘러가면서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곡이 끝나는 순간에도 전체가 조망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그대로 살아있지 않았고, 오직 기억으로만 남아 곡의 여운 속에 흐릿하게 녹아들었다. 음악은 내게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시간의 돌아오지 않음을 체험시켜줬다. (위의 책, 239쪽)       


계속해서 희가 살아가는 삶의 장면과 장면 사이 쇼팽의 음악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단지 음악에 대한 이야기이거니 싶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한 음에서 다음 음으로 흘러가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음악처럼, 우리네 인생도 비슷했다. 선택과 선택으로 이어진 선택들의 총체적인 결과가 결국 지금의 나의 모습을 구성하는 거니까. 어쩌면 희는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 선택에 대한 의미를 음악의 선율에서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 역시 수많은 선택으로 생산된 지금을 관망해 본다. 선택으로 일어난 사건들, 선택으로 잃어버린 관계들을 떠올리며 그 선택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과 결과로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나의 지금은 곡 어디쯤을 흘러가고 어떤 속도가 적절할지도.       


어느 날, 쇼팽의 열세 번째 다단조 녹턴이 멀리서 들려왔고 희는 선율을 쫓았다. 희는 다시 녹턴의 선율들의 속도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화답하며 주호의 연주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젖는다. 희는 연주를 듣고 흐느꼈으며, 무심해 보였던 세상이 천천히 응답을 했다. 주호, 소연과 관계가 모두 끊어진 지 한참 뒤였다.      


이 힘은 의미의 무한한 해석을 낳았지만 답을 내주지는 않았다. 답 없이도 나아가자며 뻔뻔스런 제안을 해올뿐이었다. 한 음을 거치며 다음 음, 한 마디가 끝나면 바로 다음 마디가 이어졌다. 그 제안이란 매 순간에 깃든 기회이자 시간의 숨겨진 역할이었다. 그랜드 피아노가 나를 대신해 흐느꼈다. 그토록 무심해보였던 세계가 나를 떠미는 듯했다. (위의 책, 267쪽)       

  

에필로그에서 희는 수없는 고민 끝에 소연에게 메일을 보낸다.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 방어에 충실했던 희가 세상에 내미는 희미하지만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희의 선택에 안도했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응원을 보내고 싶었다. 희는 ‘매 순간에 깃든 기회이자 시간의 숨겨진 역할’을 결국엔 잡아낼 거였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쇼팽, 연습곡 12 작품번호 10의 3, 마장조 (12 Etudes, Op.10 No.3 In E "Tristesse")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연주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 피아니스트의 연주라 살짝 소개해 봅니다. 

* 모바일 상에서 동영상 재생이 어려울 경우,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 

매거진의 이전글 <다크룸> 서평: 해체와 재구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