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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서윤 Jan 10. 2022

속 시끄러운 우울에 대처하기

타인을 통한 구원


꽤 많은 예술가들이 우울을 표현할 때 바다에 빠진 사람을 종종 비유한다. 우울할 때 기분은 가라앉고, 숨은 턱 막히고, 희망은 없는 상태인 게 바다에 빠진 사람과 비슷하긴 하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도 바다에 빠지면 매우 위험한데,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다에 빠지면 그 사람은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건 실제로 바다에 빠져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바다는 진짜 바다가 아닌 마음의 바다, 즉 ‘우울’이다. 우울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도와달라고 소리쳐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때면, 나를 구원하는 건 역시 나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잠시 지나가는 바람처럼 금세 곁을 떠났다. 내가 원한 건 작은 바람이 아닌 나의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줄 태풍 같은 인연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를 구원한 건 (인정하기 싫지만) 예상대로 나 자신이 아닌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커다란 상처는 스스로 치유할 수 없다는 게 조금 무섭기도 했다. 상처를 돌보아줄 사람을 원해도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으면 더 크게 상처받을 테니까. 그리고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 상처를 회복할 기회를 잃을 테니까. 상처를 회복할 기회를 잃으면 상처는 손쓸 새도 없이 곪고 곪아버릴 테니까.


나는 스스로의 의지로 우울을 극복했기 보다는 크고 작은 인연을 통해 상처를 회복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게 있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울을 극복하겠다는, 집념을 가장한 발악이 나를 포기하지 않게 도와줬고 그 결과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가능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우울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발악이 우울을 극복하는 핵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튼튼한 땅이 어느 날 발이 닿지 않는 바다가 되어 또다시 그곳에 빠지더라도, 예전처럼 나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파도를 타고 서핑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진 못하더라도, 심해에 침잠하여 물속 깊숙이 잠기진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따뜻한 사람들에게 얼마든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건 약한 게 아닌 오히려 용기가 있다는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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