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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PD Aug 08. 2021

진정한 믿음은  받아들임

있는 그대로가 사랑스럽다

어쩌다 대화가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빠의 너에 대한 기대가 어떤 것 같아"라는 질문을 한 듯하다. 딸아이의 답변은 "아빠는 나에 대한 기대 … "로 이어진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왜곡된다. 딸아이와의 지난 시간들이 뇌 전체를 휩쓴다.


기대감은 실망이 되곤 한다. 사람에 대한 기대감은 로또에 대한 그것과는 다른다. 가까운 이들에 대한 기대감은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에게 가지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크고 깊은 만큼 무너진 잔해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폐허를 바라보노라면, 미움이 싹트기 십상이다. 외면하려 하면 무관심이 되기도 한다. 기대를 받았던 이도 압박감의 피해자인데, 이번에는 사랑하는 이의 싸늘함의 추위까지 덮친다. 외로움과 자책감은 삶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반항심을 낳기도 한다.


아이의 대학 준비 기간 동안 기대감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진학에 무관심하기는 쉽지 않다. 스트레스를 주기는 쉬워도 덜어주기는 쉽지 않다. 덜어주지는 못할 망정 보태지는 않기로 한다. 에세이 작성을 도와주는 시간 동안에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최선을 다해 본다. 들킬까 걱정이다. 대학 진학 후 딸아이에게 돌아온 반응은 "아빠는 관심이 없었잖아"다.


기대를 내려놓고, 믿음으로 채워보기로 한다. 사회생활은 믿음 붕괴의 참혹함을 경험하게 한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까지 한다. 사기를 당했다고까지 몸은 받아들인다 (세로토닌 부족을 진단한 의사는 최근에 사기를 당했냐는 질문을 던진다). 단테의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는 배신 지옥이 있다. 바닥을 경험한다. 돌이켜보면, 믿음을 준건 나였고, 그는 그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배신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믿음이라는 포장지를 쓴 기대감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받아들임을 연습한다. 인류사를 공부하면서 사람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개개인의 기질적, 성격적 특성을 애니어그램이나, MBTI 등을 통해 배운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트라우마도, 아들러가 말하는 욕구도 서로 같을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누군가는 휴양지를 선호하고, 누군가는 액티비티를 좋아한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이도 있지만, 심심함을 즐기는 이도 있다. 좋아하는 연예인도 다른 게 당연하다. 선호를 넘어선 삶의 방향성은 더 다양하고 견고하다. 믿고 기다린다고 바뀌기는 쉽지 않다. 타고난 기질,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습관을 바꾸는 이는 위대한 인물의 반열에 올라야 함을 받아들인다. 나에게도 쉽지 않은 변화를 강요하는 이기심은 내려놓아야 한다. 믿음을 가장한 기대를 버리려 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행복의 순간은 빈번해지고 길어진다. 새로운 경험의 길도 열어준다.


꽃은 어떤 꽃으로 필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GMO는 자연스럽지 않다.


다행이다. "아빠는 나에 대한 기대를 가지지 않잖아"라는 말이 완성되어 들려온다. 꼭 안아준다. 있는 그대로의 딸아이가 좋다. 딸아이를 처음 만나던 날, 삶의 무게감이 버거울 때 찾아올 수 있는 아빠가 되기로 했다. 대화 상대가 되어 주고 싶었고, 휴게소가 되어 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그 꿈에 다가가고 있는 작은 증거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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