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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쁜남자 Feb 20. 2024

부모(로)부터 독립하라

내 문제가 아닌데 내가 죽겠습니다

“우리 아들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첫째답게 시작을 잘 끊어야지.”


“형이니까 모범된 모습을 보여야지.”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난 누군가의 아들이자, 어느 집안의 첫째이자, 누군가의 형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동생에서 항상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부담이 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들이기에’, ‘첫째이기에’, ‘형이기에’라는 전제조건을 들을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거기다 “아빠, 엄마는 평생 우리 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어.”라는 말로 쐐기를 박는 순간, 부모의 기대에 저버리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나를 한없이 작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문득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름 열심히 살았고, 그들의 바람에 부응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 결정이 무시당하고, 부모로부터 신뢰를 잃었다고 느꼈을 때,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문제가 아닌데 내가 죽겠습니다』라는 책을 통해 잘못된 그 무언가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임상심리사이자 심리치료사인 유드 세메리아가 쓴 『내 문제가 아닌데 내가 죽겠습니다』에서는 분리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감이 부족하며, 소유욕이 강하고, 불안과 걱정이 많은, 속칭 보살핌이 필요한 어른을 '정서적으로 의존이 심한 어른'으로 규정하며, 줄여서 '의존적 어른'이라 부른다. 의존적 어른은 '가족에 대한 충성심(family loyalty)'을 강요하면서 조력자로 하여금 자신을 보살피게 만들고, 자녀가 부모를 보살피는 '부모화(parentification)' 현상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을 '의존적 괴롭힘'이라고 정의하며, 조력자는 정서적, 심리적 불안을 느끼고, 스스로 자율성을 희생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모든 의존적 괴롭힘 속에서 이러한 잘못된 부모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부모화 전문가인 장 프랑수아 르 고프의 임상소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특성이 나타납니다. 자녀가 “자기의 능력을 벗어난 책임감을 과도하게 떠안는다.”, 자녀의 요구가 “무시되거나 악용된다.”, 자녀가 “비난받고, 행실이 나쁘다고 지탄받는다.” 장 프랑수아 르 고프는 “부모화된 자녀는 불안과 죄책감, 낮은 자존감, 관계에 대한 불신, 우울감 및 수치심을 키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유드 세메리아의 『내 문제가 아닌데 내가 죽겠습니다』 - 31쪽



자녀가 자기 부모의 부모가 되었다면, 부모는 자기 자녀의 자녀가 된 셈이다. 아이가 된 의존적 어른은 자녀들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포기했다 말하면서, 자녀들 덕분에 자신들의 삶이 의미 있다고 말한다. 본인들의 희생은 자녀들로 인해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오직 자녀만을 바라보며 고통을 견뎌왔다고 말한다. 고통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부모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며, 자녀들에게 연민과 두려움을 호소한다. 자신을 한없이 낮춤으로써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때 ‘가족에 대한 충성심’을 은연중 강요하게 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효(孝)’를 강요한다는 말이다. 부모에게 매달 용돈 얼마를 드려야 하고, 부모에게 잘해야 한다는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부모가 책임져야 할 부분을 자녀에게 떠넘기거나 자녀를 부모로부터 떨어뜨리지 않으려 하고, 죽음이나 존재, 고립에 관한 불안을 이야기하면서 자녀에게서 부모가 계속 신경 쓰이도록 만든다. 그러면서 부모가 자녀에게 해준 만큼 자녀도 부모에게 잘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딱 여기까지 상황이 책 제목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내 문제가 아닌데 내가 죽을 것 같은 상황이다. 자녀이자 지목된 조력자가 된 순간, 부모가 짜놓은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모 역시 본인이 가진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문제가 해결되면 자녀들이 본인 곁을 떠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자녀까지 정서적으로 의존이 심한 어른인 경우다. 그러면 내 문제가 아닌 것이 아니게 된다. “그래도 자식으로서 도리가 있지...”라는 생각으로 부모부터 떨어지지 못하고, 가족과 어느 정도 의존적 결합을 바라고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의존적 어른끼리 한 지붕에 살면서, 남이 해주길 만을 바라고, 본인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의존적 괴롭힘을 가하니 그 가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지목된 주 조력자는 항상 의존적 어른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입니다. 지목된 조력자는 정서적 의존성이 높은 가족과 가까이 붙어 지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조력자 역시 의존적 어른만큼이나 의존적 관계에 매달린다는 것이지요. 결국 지목된 조력자 또한, 스스로 깨닫지 못하지만 분리 및 유기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정서적 의존성이 높은 어른인 것입니다.

유드 세메리아의 『내 문제가 아닌데 내가 죽겠습니다』 - 275쪽



의존적 어른에게 지목된 조력자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존적 어른에게 자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타인의 책임을 내가 짊어질 필요가 없다. 의존적 어른인 부모의 삶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부모가 나 없이 살아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부모 없이 살 수 있어야 한다.



의존적 어른도 마찬가지다. 반복 학습된 무력감에서 벗어나야 하며, 결코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인정하여 불안과 걱정으로 이어지지 않아야 하며, 조력자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자녀가 내 곁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나 먼저 자녀 곁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느 부모도 내 자녀가 남에게 의존하는 자녀로 키우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독립성이 떨어지는 아이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부모부터 변해야 한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의존적 어른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하지만, 그에 앞서 부모부터 독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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