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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쁜남자 Sep 17. 2023

복종에 반대한다

순대를 마요네즈에 찍어 먹겠다는 아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응. 그래. 현상이도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들어라.”



설날에 큰집에 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세배를 드리면, 어김없이 듣는 덕담이 부모님 말씀 잘 들으라는 말이다. 



꼭 세배 때 듣는 덕담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만약 학교에서 새해 목표를 적으라고 하면 ‘아침 일찍 일어나기’, ‘공부 열심히 하기’, ‘게임 조금 하기’와 함께 꼭 들어가는 내용 중 하나가 ‘부모님 말씀 잘 듣기’였다.



부모 입장에서 자녀가 말을 잘 들으면 몸과 마음이 편하다. 부모가 하라는 대로 자녀가 움직이니 부모로서 자녀의 행동이 예측 가능하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관한 불안감이 없다. 만약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도 부모가 “하지마!”라고 외치면 자녀가 그 일을 멈출 테니 부모로서 걱정이 없다.



자녀가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고, 그 나이대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정해져 있기에, 어른인 부모가 자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너무 당연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당연히 알지 못하니 알려줘야 하는 훈육은 필요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자녀가 부모님 말씀에 복종하도록 키운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자녀가 나이를 먹고 부모처럼 어른이 되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힘이 저절로 생길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몸만 컸을 뿐이지,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많다. 더 큰 문제는 부모에게 복종하며 사는 자녀 입장에서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다.



부모에게 복종하며 성장한 아이는 사회에 나가서도 권력을 가진 권위자에게 복종하며 살아간다. 권위에 저항하는 힘을 상실하고, 진실을 직시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통치자의 입맛에 맞춰 살아간다. 나라를 이끄는 자가 아랫사람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면,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그런 나라를 독재국가라고 말한다. 



독일의 저명한 심리학자 아르노 그륀(Arno Gruen)은 『복종에 반대한다』라는 책에서 한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겪는 복종에 대한 강요의 무서움과 그로 인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복종하는 건, 부모로부터 태어난 아이가 선천적으로 갖는 하인 근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무비판적인 복종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생각이니 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나 어머니의 제압적인 힘을 통해 우리에게 깊이 뿌리박힌 하인 근성이다. 어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런 하인 근성을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부모가 우리에게 휘두르는 힘을 인식하지 못한다. 부모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존재, 우리를 위해 최고의 것만을 바라는 친절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르노 그륀의 『복종에 반대한다』 - 16쪽





우리 인간은 다양한 성향과 성격을 가진다. 다채로운 인간이 부모가 되었으니 가정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어느 한 가정에 태어난 아이는 그 집안의 부모가 만들어놓은 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불만도 없고 의심도 없다. 



평생 막장에 순대를 찍어 먹던 사람이 소금에 순대를 찍어먹는 사람을 보면 깜짝 놀라는 거와 같다. 순대를 막장에 찍어 먹는 거에 불만도 없었고, 꼭 막장에만 찍어 먹어야 하는 의심도 하지 않는다. 순대를 막장에 찍어먹든, 소금에 찍어먹든,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지역마다 식당에서 막장을 주면 막장에 찍어 먹고, 소금을 주면 소금에 찍어 먹으며 산다. 그 과정에서 자기결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면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구조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이때 가장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본적 신뢰다. 그리고 기본적 신뢰는 갓난아기의 욕구와 이를 인지하는 어머니의 능력이 성공적으로 상호작용할 때에만 생겨날 수 있다. 그래야만 아이가 두려움과 죄책감 없이 발달할 수 있으며, 나중에 어머니의 품을 떠나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다.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애착관계는 정체성이 자율성으로 발달되느냐 아니면 복종으로 발달되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아르노 그륀의 『복종에 반대한다』 - 117쪽





“엄마~ 순대 찍어 먹게 마요네즈 주세요.”


“순대를 왜 마요네즈에 찍어 먹어? 그냥 그 앞에 있는 소금에 찍어 먹어!”


“소금은 너무 짜요. 마요네즈가 더 맛있어요.”


“순대를 마요네즈 찍어 먹는 게 뭐가 맛있어! 그냥 소금 찍어 먹어!”


“마요네즈 주세요!”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왜 이렇게 엄마 말을 안 들어!”



아르노 그륀은 복종에 반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감능력과 신뢰라 말한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나와 다른 목소리를 이해하고 믿어주는 것이다.



엄마는 순대를 마요네즈에 찍어 먹는 게 더 맛있을 거라는 자녀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고, 엄마가 판단하기에 마요네즈에 찍어 먹는 순대가 맛이 있을 거라는 신뢰가 없으니 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이다.



아르노 그륀의 『복종에 반대한다』라는 책이 금쪽이를 키우는 법을 담은 오은영 박사의 책 느낌은 전혀 아니다. 극우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통치자가 권력을 장악하는 걸 염려하고,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서 맹목적인 복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강력하게 주장하는 책이다. 그 과정에서 복종의 근본적인 원인이 유아기 때 형성된다는 걸 밝혀내며, 복종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부모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자녀의 의지가 어느 한 개인의 인생만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 어느 한 사회의 미래도 결정한다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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