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를 실망시키는 기술
“하나님 믿으세요.”
“엄마는 아들 믿어.”
각 문장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아들을 향한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같은 것일까? 설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들은 종교도 아니고 신은 더욱더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이 곧 진리이기에 우리는 기도하며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간다. “하나님, 그러시면 안 되고, 이렇게 하셔야 우리를 구원해주실 수 있어요.” 이런 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멋대로 해석하고, 불순하게 반기를 든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단이다. (참고로 난 종교인은 아니다. 그냥 그 세계에서는 그렇다는 거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믿음은 어떨까? 부모는 자녀가 원하는 대로,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알아서 잘 살 거라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부모는 자녀가 내(부모)가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가길 원하고, 자녀가 내(부모) 기대에 부응하길 바란다. 그래서 “엄마는 우리 아들 믿어.”라는 말에는 “엄마는 우리 아들이 (내 뜻대로 자라줄 거라) 믿어.”, “엄마는 우리 아들이 (내가 시킨 대로 해줄 거라) 믿어.”, “엄마는 우리 아들이 (엄마 말대로 그 일을 멈춰줄 거라) 믿어.”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다. 괄호에 담긴 내용은 쏙 빼놓고 “엄마는 우리 아들 믿어.”라며 본심을 숨기고 믿음을 내세운다.
그 점에 있어서 두 믿음은 유사하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해줘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구원이다. 자녀에 대한 믿음에도 자녀가 나(부모)를 위해 해줘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부모)가 자녀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그 모든 것이다.
하지만 극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 멋대로 해석할 수 없고, 반기를 들 수도 없다. 정확히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와 ‘다른 생각’ 혹은 ‘틀린 생각’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종교라는 이름 아래 연결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매우 견고하고 탄탄하다.
문제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믿음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분명 ‘다른 생각’ 혹은 ‘틀린 생각’이 존재한다. 그 순간 갈등이 일어나고, 서로간의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엄마가 너를 믿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 말에는 부모의 기대와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은 자녀에 대한 배신과 원망이 담겨있다. 믿음이 깨지는 순간, 두터운 신뢰는 불가능해진다. 이처럼 부모와 자녀의 믿음은 언제든지 깨지기 쉬운 유리잔 같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는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에서 타인이 나와는 ‘다른 생각’, 경우에 따라서는 ‘틀린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진정한 신뢰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서로 다름을 이해했을 때, 진짜 믿음과 신뢰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믿음’은 타인의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이건 정말 중요한 이야기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고 믿는 것은 신뢰가 아니다. 강요다. ‘엄마는 믿는다’ 또는 ‘아빠는 믿는다’고 이야기할 때 ‘자녀의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김정운의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28쪽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없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과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당연히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녀는 다른 사람이기에 자녀는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어차피 깨질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듯, 믿음과 신뢰가 깨질 수 있다는 전제마저 인정하며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방법은 없을까? 뮌헨 예수회 철학 대학 학장을 역임했던 미하엘 보르트 신부는 『부모를 실망시키는 기술』을 통해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녀는 건설적인 방법으로 부모를 실망시키는 능력을 갖춰야 하고, 부모는 실망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부모에게 우리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기를 원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부모에게 낯설게 되고, 우리에게 선의를 베풀고 싶은 것들이 더 어려워지고, 부모가 우리에게 새로 적응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이 크면 클수록 실망이라는 기회 역시 커진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한 성인이 다른 성인과 만나는 기회 말이다.
미하엘 보르트의 『부모를 실망시키는 기술』 - 140쪽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 수 없다. 반대인 부모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실망감을 느끼는 건 부모보다 자녀가 더 먼저다. 부모 역시 자녀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지 못한다는 소리다. 그러니 이제 결정해야 한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고 순종하며 살 것인가, 부모에게 실망을 주더라도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 것인가. 전자의 삶은 부모는 만족할지언정 자녀는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진다. 후자의 삶은 실망 그 자체를 인정하면서 보다 더 진실한 자신과 부모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다. 과한 기대는 욕심이다. 인간관계에서 욕심이 작용하면 누군가는 분명 상처를 입는다. 상대를 내가 세운 기준에 맞추겠다는 욕심으로 과한 ‘기대’만을 내비치는 사람이 아니라, 혹여 상대가 실수를 저질러도 내게 편히 ‘기대’어 쉴 수 있는 넓은 어깨를 가진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지금 당장은 자녀로서 그리고 훗날 부모로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