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닝머신에서 달리기 운동하면서
헬스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운동기구는 런닝머신일 것입니다. 어느 헬스장이나 여러 대의 런닝머신이 일렬로 정렬되어 있습니다. 탄탄한 몸매를 가진 여성도, 배가 볼록 나온 남성도, 근력 운동이 부담스러운 어르신들도, 이제 막 운동을 시작한 어린 친구들도, 누구나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운동기구가 런닝머신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살 빼는 목적으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살을 좀 찌우고 근육을 늘려 몸집을 좀 키우기 위해 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유산소 운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습니다. 본격적인 근력 운동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예열하는 느낌으로 런닝머신 위에서 10분 정도 빠르게 걷고, 근력 운동을 마치고 나서 10분 정도 빠르게 걷는 것으로 그날 운동을 마무리합니다.
런닝머신 위에서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보면, 어떤 분은 전속력으로 달리시고, 어떤 분은 천천히 걸으시고, 어떤 분은 저처럼 넓은 보폭으로 빠르게 걸으시고, 어떤 분은 뒤로도 걸으십니다. 여담이지만, 가능하면 뒤로는 걷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런닝머신 위에서 뒤로 걷는 건 조금 위험한 동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런닝머신 위에서 각자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걷거나 달리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제자리걸음 중이고, 누구 하나 앞서가거나 뒤쳐져있지 않습니다. 평지라면 다른 결과가 나왔겠지만, 런닝머신 위이기에 가능한 결과입니다.
런닝머신 위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 쓴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이 떠오릅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이지만, 주인공이 앨리스라는 점 빼고는 특별한 연관성은 없습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은 앨리스의 손을 잡고 끊임없이 달리지만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있습니다. 어쩌면 그나마 열심히 달렸기에 계속 제자리에 머물 수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붉은 여왕은 앨리스에게 제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작가 루이스 캐럴은 붉은 여왕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열심히 달려보지만, 아무런 진전된 성과를 이루지 못하는 무능한 권력자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대학 진화생물학자인 리 밴 베일런(Leigh Van Valen)은 1973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붉은 여왕의 가설(Red Queen's Hypothesis)’이란 이론을 제안합니다.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영감을 얻은 이 이론은 급속도로 변하는 환경과 다른 생물들과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단히 적응하고 진화를 거듭해야 하며, 만약 그러지 못하고 제자리에만 머물 경우 결국에는 도태되고 만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생물은 멸종하는 반면, 어떤 생물은 오늘날까지 지구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는 건 뒤처지지 않게 내리 달리는 붉은 여왕의 자세로 진화를 거듭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붉은 여왕의 가설’은 리 밴 베일런 학자가 주장한 이론일 뿐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님께서는 진화란 방향성이 없고, 목적성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진화란 자연 선택 과정에서 발생한 우연의 결과물일 뿐이지, 진화가 늘 진보되고 발전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보다는 다양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해온 것이 진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계속 적응하고 발전해나간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시선으로 진화를 바라본 리 밴 베일런의 주장과는 다른 주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런닝머신 위에서 열심히 걷거나 뛰지만, 결국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분들을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붉은 여왕처럼 무언가를 잘해보려고 발버둥치지만 좀처럼 좋은 결과를 내놓지 못하는 무능한 인물로 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리 밴 베일런이 주장한 ‘붉은 여왕의 가설’에 대입하여 결국에는 도태되고 멸종되고 말거라고 보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비록 제자리걸음이지만 런닝머신 위에 오른 것만으로도 그 누구보다 한걸음 앞서가고 있는 거라 믿습니다. 집에서 편히 쉬고 싶고,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고 싶지만, 무거운 몸을 이끌고 헬스장에 와서 런닝머신 위에 오릅니다. START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는 멈출 수 없습니다. 걷고 싶지 않아도 걸어야 합니다. 그 자체만으로 성공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거친 숨을 내쉬며 속도를 높여 뛴다고 해서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나와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빨리 뛰어도 날 추월할 수 없고, 나 역시 상대를 추월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이겨야 할 상대는 런닝머신 위에 오르고 싶어 하지 않는 나태한 내 자신입니다. 제자리걸음 인생이라고 도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태한 인생이라면 도태됩니다.
런닝머신에서 달리기를 하며
오늘도 딴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