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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화래진 Dec 16. 2021

가장 길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

: 짝사랑

 나는 원래 기질이 금방 금방 잘 질리곤 하는데 가끔은 하나에 꽂히면 계속해서 좋아하곤 했다. 그게 늘 물건이었던 와중에 어느 날은 한 아이가 나에게 들어왔다.


 같은 학원을 다녔던 친구인데 그냥저냥 내 눈엔 보이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마디로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로 왔다. 그냥 나한테 와버렸다. 그날은 화이트데이로 학원이 떠들썩했는데 사탕 하나를 가지고 나한테 왔다. 그날부터 그렇게 8년을 좋아했던 것 같다.


 진짜 말도 안 되는 거 알지만 나한테 오는 그 아이한테서 빛이 났다. 나도 이게 상상이 보태졌다고 느끼지만 그땐 그게 맞았다. 그날 처음으로 그 아이 얼굴을 똑바로 봤는데 이렇게 잘생긴 친구가 있었구나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후드려 맞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름은 대충 알고 있는데 같은 학교인 거 같기도 하고, 몇 반인지, 친구는 누군지, 공부는 잘하는지, 운동장에 매일 나가서 운동을 하는지 전부다 궁금한 거다. 보다 보니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고 있었고, 운동도 잘했고, 중요하진 않지만 공부도 꽤 잘했다. 친구도 많았고, 특히 무리 지어 다니는 친구 중에 나와 친한 친구도 있었다. 이걸 기회 삼아 나는 결국 그 아이와 친해졌다. 근데 문제는 너무 친해져서 이제 어쩌지 싶은 거다. 우선 보고 싶으니까 맨날 보자고도 해봤고, 학교에서도 다른 반까지 놀러 가서 재밌게 놀았는데 어째 놀기만 하는 거다.


 노는 건 재미있지만 커져가는 마음은 재미있지 않았다. 짝사랑이 으레 그렇듯 상대방의 한마디에 기분이 하늘을 날다가도 또 한마디에 땅으로 꺼져버리니, 가뜩이나 내 맘 같지 않던 시기에 난 엄청난 적수를 만났다. 한 번은 아파트 앞 횡단보도에서 그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정신을 놓다가 1시간이 지났다. 보고 싶은데 부를까, 오늘은 무슨 핑계를 대지?, 짐이 많다고 해볼까?, 뭐하냐고 물어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그렇게 서서 시간을 보냈다. 가뜩이나 보고 싶은데 생각하니까 더 보고 싶었다. 지금이면 드라이브 가자고 꼬시고, 맛난 거 사준다고 꼬시고, 영화 재밌는 거 나왔다고 또 꼬실 텐데 그때는 놀자는 핑계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오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1년, 2년, 3년 지내다 보니 이게 아닌가 싶었다. 당시에는 고백을 할바에는 접시에 코 박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미련하고 순수하게 같이 놀았다.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100번 보고 싶으면 한번 부르고 연락이 그렇게 귀찮은데 맨날 문자하고 그랬다. 그 아이는 착한 건지 다정한 건지, 배고프다 하면 엘리베이터로 간식을 보내주곤 했는데 그거 먹으면서 웃기면서 좋았고 설렜다. 요구르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는데 설렐 일인가 싶으면서도 그 아이가 나를 위해 행동했다는 게 기분이 좋아서 마음이 간지러웠던 거겠지. 나를 좋아하나? 내가 좋아하는 것처럼? 착각만 또 몇 년을 하다가 우리는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됐으니까 당연히 나랑 사귀겠지 싶었다.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처음 사귀는 상대는 그 아이였으면 했다. 어느 날 그 친구의 프로필 사진이 커플사진인걸 보고 놀랐다. 근데 옆에 있던 친구가 내 친구라 두 번 놀랐다. 놀긴 나랑만 논거 같은데 대체 언제 눈이 맞은 걸까?  당시 짝사랑 6년 차였다. 7년 차쯤엔 헤어졌다면서 날 술집으로 부르길래 치맥이나 하고 있는데 내 맘도 모르고 그 친구는 생맥주나 들이키면서 맛있어했다. 괜히 얄미워서 잔 밑을 쳐서 실수인 척 흘려볼까 생각하던 찰나에 불쑥 이상한 말이 나왔다.

-나도 좀 내숭을 떨어야 할까 봐, 맨날 이상태로 남자를 대하니까 친구밖에 안돼.

-너는 솔직한 모습이 매력이야. 내숭 같은 거 굳이 안 해도 돼.

 

 그렇게 그 친구는 내숭 쩌는 두 번째 여자 친구를 만났다. 나는 점점 그의 제일 친한 여사친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자 친구들은 내가 자기 남자 친구랑 술을 마시던 밥을 먹던 신경도 안 썼다. 내 매력이라던 털털함과 솔직함은 이럴 때만 유용하게 쓰였다. 나는 보통의 사람이라 연인이 있는 상대에게 마음을 표현할 만큼 뻔뻔하지도 못했다. 그냥 딱 친구. 거기까지였다. 그러다가 나도 사귀는 사람이 생기면서 조금씩 멀어졌다. 가끔 만났지만 뭐 평소랑 다를 게 없었다. 나도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 친구도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내가 헤어졌을 때, 그 친구는 새로운 사람과 결혼했다.


 차마 결혼식에 갈 수가 없었다. 쿨하게 축의금만 내고 사라지고 싶었는데 그러기가 이상하게 힘이 들었다. 그냥 거기 안 가고 싶었다. 오래 좋아했던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내 발목을 잡았다. 그동안 나도 누군가를 만났지만 은연중에 결혼은 저 친구와 하지 않을까... 나는 결혼은 안 하고 싶지만 만약 한다면 저 친구와 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마지막 상상까지 깨지자 내 마음 한쪽이 또 공허해졌다. 언젠가 어떤 구절에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날 슬프게 한다고 했다. 느꼈던 슬픔 중 가장 얇고 깊은 슬픔이었다. 8년을 좋아하고 4년을 정리했다. 도합 12년의 세월 동안 마음 한구석에 크게던 작게던 존재해 있었다. 살아온 세월보다 그 아이를 좋아한 기간이 더 길었던 때도 있었다. 내 인생의 반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고 그 친구 아니면 애인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 아이가 연애를 하면 마음이 너무 공허해서 나도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게 아니다 싶어 헤어지기도 하고 어쩌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 오래 연애하기도 했다. 그렇게 반복하다가 이제는 남은 찌꺼기까지 떨어져 나갔다. 짝사랑의 잔재였다. 누굴 만나도 마음 한편에 찐득찐득하게 붙어 있었던 잔해였다. 그 아이를 향한 감정인지, 그 아이를 순수하게 좋아했던 과거의 나를 좋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때의 기억으로 가끔 살아가고는 있다.


 예쁜 추억이 있었지.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했었지. 가장 온 마음을 다 했다며 그렇게 회상한다. 이제 그 친구 얼굴이나 어떤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첫 만남에 그 아이를 보던 내 마음만 기억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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