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살 넉넉한 그런 바위이고 싶다.
어느 드라마에서 말하길 마음은 물감과 같아서 안 쓰면 굳어버린다고 했다. 제목이 호구의 사랑이었던가.
평소에는 팔레트에 있는 굳은 물감처럼 굴다가도 한 번씩 갓 짜낸 것처럼 일렁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진자 운동하는 추처럼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 맛봤다. 경험하고 나니 나는 마음의 동요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매번 마음이 생기면 덮기 일수였고 감추기 급급했다. 어차피 사라질 감정이니 티를 낼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 상대에게 누군가 생기면 말도 못 할 질투가 솟곤 했는데 이를 삭히는 것 또한 당연히 내 몫이었다.
이상하게 내가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에게는 금방 연인이 생겼다. 지금껏 늘 그래 왔다.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을 알아서 누군가를 좋아하면 더 초조하고 화가 난다.
한 번은 사주를 보러 갔었다. 한때 맹신했던 때가 있었다. 항상 듣던 말 중 하나가 남편 자리에 항상 경쟁자가 있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였는데, 지금은 다른 건 다 기억나지 않고 딱 저말 하나만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 마음에 들면 자연스럽게 나의 경쟁자가 누구인지 둘러보게 된다. 지금껏 삼 남매로 태어나 경쟁사회에서 평생을 경쟁만 하다 살아왔는데 순수하게 누굴 좋아하는 것조차도 경쟁 없이는 안된다는 말에 맥이 빠졌다. 그냥 서둘러 마음의 평온을 찾는 게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학생 때는 부딪히는 사람이 많아 쉽게 누군가에게 정을 주고 마음을 내어줬다. 열이 오르고 식는 과정도 많이 겪었다. 이후에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면서 여유가 더더욱 없어졌고 마음의 온도를 무시하는 일 또한 잦아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바위처럼 누굴 만나도 어떤 동요가 없었다. 불씨라도 보이면 거리를 뒀다. 불씨가 꺼져야 그때부터 상대를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평소엔 멀리서 바라보다 마음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뜻대로 온도를 낮추곤 했는데, 유독 힘든 경우가 있었다. 나와 가까워진 상대를 마음에 두는 일이었는데 거리를 둘 수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나도 누울 자리 보고 뻗을 줄 알아서 내게 인간적인 호감인지, 이성적 호감인지는 기똥차게 잘 아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눈치라도 없었으면 마음은 편했을 건데. 바닥 금 간 항아리를 들고 있는 처량한 사람처럼 이를 어쩐담... 을 중얼거리곤 했다.
이것저것 주고 싶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게 단순히 함께 있는 시간이 재밌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좋아서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긴 좋으니까 뭘 해도 재밌었겠지. 그동안 사랑이 뭔지 궁금해했던 게 사실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어서였다는 것 또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평소엔 남한테 관심이 쥐뿔도 없으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고찰하고 있었을 쯤엔 알아챘어야 했는데. 연락이 기다려지는 게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었을 건데. 가랑비에 소매 젖었을 때쯤 말리던가 갈아입었어야 했는데. 말도 안 되는 후회를 빙자한 애정의 증거를 쫓다가 마음만 커져 다시 감당 못할 하루를 보냈었다.
더 이상 마음이 파동 치는 걸 볼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내게 그런 여유가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학생이었고, 직장인이었고, 어떤 것이었다. 나라고 상대와 내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그리지 않은 게 아니다. 다만 눈앞의 일들이 내 발목을 잡았고, 평소에는 있지도 않던 자존심이 나를 붙잡았고, 마음을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다. 나는 그래서 다시 바위가 되길 원했다. 어떤 동요도 없이 굳은살이 적잖이 잡혀있는 그런 바위 말이다. 갓 짜내서 찰랑거리는 물감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시몬스 침대처럼 흔들리지 않을 때 가장 편안한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