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엄마가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난 후, 정말이지 나도 다시는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동안 설거지를 하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억울함에 북받쳐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엄마가 내게 모질게 대했던 기억들만 떠올라 그 미움을 감당하는 일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내가 바란 건 그저 약간의 '미안한 기색'이었다. 사과까지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랬구나.' 하는 인정의 말, 아니면 차마 용기 내지 못한 침묵이어도 좋았다.
당신으로 인해 마음을 다쳤다는 딸에게 그렇게 당당할 것 까지야 있었을까.
어른들의 지난한 삶 속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존재했을까. 그저 박제된 채 시간을 지나왔을까.
어른이 어른으로서의 무게를 지탱했던 것처럼, 아이들도 저마다의 무게를 버텨왔다.
그저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는 이유만으로 자식 앞에 무조건 당당할 수 있는 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엄마가 지닌 삶의 무게를 옆에서 또렷하게 바라보며 자라왔다. 그래서 미웠지만 불쌍했고, 어쩌면 성격이 이상해진 것도 그런 풍파 때문 일 거라 짐작한다.
자식인 나는 이렇게 애써 엄마를 이해해보려 노력하는데 엄마는 자신의 과거에 파묻혀 세상 누구도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 그런 엄마 앞에서 아프다고 소리치는 나는 아마 오히려 괘씸해 보이기만 하는 듯했다.
'내가 어떤 고생을 하면서 너를 키웠는데 네가 감히'라는 말이 나올 때면 난 늘 작아졌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런 엄마의 태도 때문에 평생을 남의 집에 얹혀사는 기분으로 지내야 했던 나는, 어디서 위로를 받아야 할까.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
'자식은 부모의 측은지심으로 자란다'는 것.
돌이켜보니 내게 가장 필요했던 건 넉넉한 용돈도, 고기반찬도, 좋은 옷도 아닌 부모의 '측은지심'이었다.
우리 부모 둘 중에 한 명이라도 날 좀 가여워해 주는 이가 있었다면 내 마음이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텐데….
스스로 강한 척하며 자라느라 마음 곳곳이 굳은살 투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연락을 한 건 나였다. 다시 잘 지내보고 싶어서? 내가 잘못했다고 느껴서? 천만에.
전화를 끊기 전 엄마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네가 나랑 의를 끊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그럼 안 보고 살면 되겠네!
평생 엄마로부터 정서적 가해를 받고 자라온 내가, 졸지에 모녀관계를 먼저 끊어내는 가해자로 남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논리대로라면 이대로 나는 그저 '천하의 독한 년'으로만 남을 것 같았다. 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길래.
엄마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과장되게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앙금은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바닷속 모래처럼 가라앉아 작은 파동에도 금세 물을 흐리고 만다.
그 이후로 나는 친정으로 가는 횟수를 줄였고, 엄마와 부딪힐만한 모든 경우의 수를 줄여나갔다.
그리고 구정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남편 회사에서 부부동반으로 건강검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출산을 한 지 1년이 좀 넘은 시기여서 추가로 복부초음파도 진행했다. 워낙 감기도 잘 앓지 않는 건강체질인 터라 검진이 끝나면 무얼 먹을지 고민하면서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복부초음파 단계, 검진의사가 한 곳을 계속 문지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간에 물혹이 보인다며 바로 CT를 찍어보는 게 좋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물혹?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당장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증상이 없는 간 물혹을 가지고 사는 이들도 꽤 많다고 해서 안심하려 애썼다.
몇 주 후, 결과를 들으러 간 병원에서 너무나도 놀라운 결과를 전해 들었다.
크기가 꽤 크네요.
라는 말로 입을 뗀 의사는 곧바로 내 간의 사진을 보여줬다.
나는 너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는 내게도 어마어마한 혹의 크기가 바로 보였기 때문이다.
10.5cm, 테니스공 만한 물혹이 내 간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혹 안에는 불순물 같은 것도 섞여 있어, 단순 물혹이라 예견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그때 할 수 있는 건, 유모차에 앉아 말똥말똥 나를 바라보고 있는 딸을 보며 엉엉 우는 일뿐이었다.
엄마가 울자 따라 울지도, 웃지도 못하던 아기의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크기가 워낙 커서 수술을 해야 하고, 혹을 떼어 낸 다음에야 조직검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물혹의 위치 때문에 간 가운데 부분을 도려내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부위가 워낙 커서 복강경술은 불가하고, 개복으로만 가능하다고 했다.
'청천벽력'이라는 이 상투적인 표현이 그렇게 와 닿았던 때가 있었을까.
내 뱃속에 그렇게 큰 혹이 들어있다니, 게다가 암일 수도 있다니. 지금부터 내가 뭘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아이를 보며 또 웃다가,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가, 어느새 내 마음은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암울해졌다.
구정을 앞둔 시점이라 명절을 쇠러 가야 했는데, 도무지 식구들 앞에서 웃고 앉아있을 자신이 없어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그해 설날은 집에서 보냈다.
아무래도 개복수술은 너무 두려워서 혹시 서울로 가면 답이 있지 않을까 싶어 서울대병원으로 예약을 잡고 갔더니, 복강경과 개복술 반반의 확률이라고 했다.
수술일정은 두 달 뒤로 잡혔고, 엄마에게는 내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람 중 가장 마지막으로 알렸다.
엄마는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까짓 거 떼면 그만이라고. 괜찮을 거라고.
진심을 담은 말이었겠지만, 길 가다 지나가는 누구라도 내게 해줄 수 있는 그 말을 엄마에게서 듣는다고 내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그리고 수술을 한 달여 앞둔 어느 날, 엄마의 생일이었다. 일요일 아침 아이와 놀아주고, 끼니를 챙겨 먹이다 보니 어느새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어차피 그 시간에 전화해봤자 엄마는 교회에 있을 터라 12시가 지나 남편에게 전화를 하라고시켰다.
먼저 전화를 받은 남편이 장모님 생신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자, 엄마는 당신의 생일을 잊었느냐고 먼저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에요. 장모님. 교회 가셨을 시간이라 지금 전화드렸어요. 네. 네. 용돈 보내드렸어요. 맛있는거 사 드세요.”
당황하는 남편의 목소리, 그리고 전화기는 내게로 넘어왔다.
너 엄마 생일 잊어버렸지? 그래서 지금 전화한 거지?
전화를 넘겨받은 내게 엄마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아니라고 말해도 이미 엄마는 화가 나 있었다.
엄마 생신날 와서 미역국도 못 끓여드리고
죄송하다고는 못할 망정
아침에 전화 한 통 도 안 하고,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 게
그렇게 밖에 못하니?
너 네 시어머니한테도 그러니?
날 무시해서 그러는 거지?
나한테는 차라리 괜찮아.
너 시댁에 그러면 내 얼굴에 먹칠하고 다니는 거야 알긴 아니? ….
분노에 찬 엄마가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서 나는 당황하고, 너무 듣기 싫은 나머지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말았다.
그래도 저 너머로 나를 향한 비난의 말은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가 내 뱃속에 암일지도 모를 10.5cm짜리 혹이 자리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날 엄마는 교회에서 무슨 기도를 하고 나왔을까.